제8장
한 시간이 흘러 나는 H대 병원 정형외과 응급실에 오게 되었다.
흰머리에 자애로운 웃음을 띠고 있는 늙은 의사 한 분이 내 팔을 잡고 있었다.
그는 옆에 서 있는 준수한 남자한테 고개를 끄덕였다.
“탈골이야.”
그 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르신, 정골 수법 전공이시잖아요. 원위치로 회복해 주실 수 있어요?”
어르신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힐끗했다.
“너도 참! 자꾸만 내 인정으로 남한테 베풀 거야!”
그는 내 팔을 천천히 돌리며 물었다.
“아가씨, 이놈이 아가씨를 괴롭혔어요?”
나는 그 남자를 몰래 힐끔거리며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는... 이 사람이 누군지 몰라요.”
어르신은 싱글벙글이었다.
“모른다고? 모르는데 이놈이 왜 이렇게 잔뜩 긴장해 있는 거야?”
오는 길 내내 추태를 부리며 그의 양깃을 부여잡고 울었던 기억이 떠오른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푹 숙였다.
‘우두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미처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팔에서는 통증이 사라졌고 나는 깜짝 놀라 팔을 움직여 보았다.
안 아프네?
뭐가 이렇게 신기해?
어르신은 자애로운 미소를 띠었다.
“더 움직여 봐도 돼. 괜찮아.”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조심스레 한 바퀴 돌려보았다.
정말 안 아프네!
얼른 그분한테 허리를 구부려 감사 인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멍청한 게 아닌 나는 앞에 서 있는 상냥하고 친절한 노인이 H대 유명한 정형외과 성수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수많은 고관과 귀인들은 정형외과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필사적으로 이 노인을 찾아 나섰었다.
환자들한테 인심이 드넓은 어르신은 매주 일반 환자들을 위해 번호를 내여주곤 했었다.
그리고 환자들마다 진료비로 100원만 받고 있었고 환자들을 치료하고 지낸 지난 50년 동안 병 치료에만 집중하는 신의였다.
그의 이러한 성격 탓인지 그의 진료를 받으려는 환자들은 줄이 끊이질 않았다.
나는 저도 모르게 옆에서 얌전히 웃음을 머금고 있는 청순한 남자한테 눈길이 갔다.
스물일곱 살 정도로 돼 보이는 그는 육하준보다 훨씬 성숙하고 듬직해 보였다.
절제된 그레이와 블랙의 슈트 핏으로 인해 완벽한 비율의 훤칠한 키를 자랑하고 있다.
게다가 반태 안경으로 오뚝하게 솟은 콧등을 도드라지게 연출하고 있었고 눈빛은 심오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노인과 담소를 나누며 일거수일투족이 차분하고 평온해 보였다.
원래는 육하준이 내가 여태껏 본 사람들 중 가장 잘생긴 남자인 줄 알았었다.
냉혹하고 예리한데다 남성미가 철철 흘러넘쳤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남자는 육하준하고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외모로만 봤을 때 육하준하고 막상막하였다.
만일 육하준은 칼집을 낸 보검이라면 이 남자는 절정의 수목단청이었다.
육하준은 한 검으로 열아홉 개 주를 베어버릴 수 있다면 이 남자는 천하 만물을 품에 안을 수 있는 다정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다.
두 사람이 누가 더 잘생긴 건지 구분하기는 어려워도 지금의 나로서는 이 남자의 침착함에 더 눈길이 간다.
대화를 나누던 사이 그 남자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한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유상미 씨, 어디 또 불편한데 있어요?”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흔들려다 불쑥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르신은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얼른 봐봐요. 작은 병도 시간을 끌다 보면 큰 병이 될 수 있어요.”
어젯밤 허리와 발을 부딪친 발을 살피던 어르신은 내 뒤통수를 만져보았다.
아주 열심히 검사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어르신은 연신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어머, 여린 여자아이가 어쩜 상처가 이리도 많을까! 옆구리에 상처로 보아 하마터면 뼈가 부려질 뻔했어. 이따가 원위치로 회복해 줄게. 다리는 그나마 삐인 거라서 다행이네.”
“게다가 뒤통수는...”
어르신은 갑자기 화를 내셨다.
“어쩜 자기 몸을 제대로 아낄 줄은 몰라!”
어르신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처방전을 써 내려갔다.
“머리에 골절뿐만 아니라 부종도 있어. 자기 목숨을 아낄 줄도 알아야지.”
“부종을 철저히 없애지 못하면 두개내압이 높아질 수가 있어. 그땐 큰 일이야. 이 몸으로 싸움질이나 하고... 어휴.”
어르신은 화가 나 중얼거리면서도 재빨리 처방전을 써주었다.
그런 그의 교훈으로 인해 나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내가 얼마나 심각하게 다친 건지도 모르고 입원해 있는 동안 육하준은 한 번도 병문안을 와준 적이 없었다.
그 사람의 밉살스런 비서는 내 부상이 호전되자마자 퇴원을 해댔으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서러움이 밀려온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르신의 옆에서 잘못을 저지른 아이에 흡사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남자가 그런 어색함을 깨트렸다.
“어르신, 노여워하지 마세요. 상미 씨도 자기가 이렇게 심각한 줄 모르고 퇴원했을 거예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아프면 병원에 찾아가는 게 당연지사잖아요.’
처방전을 다 쓰고 난 어르신은 그나마 표정이 풀어진 듯했다.
그러다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내 모습에 얼른 위로를 해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울지 마. 방금 올 때 간호사들이 아가씨가 우는 걸 다 들었었는데 또 울면 안 되지.”
그는 옆에 있는 남자를 흘겨보았다.
“너도 문제야! 얼른 데리고 가서 연고 치료나 받아. 허리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3일 정도 들러야 돼. 내가 직접 침을 놓아야 병의 근원을 없앨 수 있어.”
”알겠어요.”
그 남자는 당장 그녀를 부축하여 청결실로 끌고 갔다.
진료실을 막 나오자 그녀와 그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무섭다!
소문으로만 듣던 유명한 정형외과 이토록 무서울 수가!
나는 죄송스레 말을 건네고 있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손톱을 너무 후빈 탓에 살집이 거의 벗겨질 지경이었다.
내 머리 위로 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기억 안 나?”
“네?”
난 더욱 의아해졌다.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래요. 이름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 남자는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부드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너네 오빠하고 아는 사이야. 어릴 때부터 날 나무 오빠라고 부르기도 했고.”
나무 오빠?
잠시 어리둥절해진 나는 어릴 적 기억들이 한꺼번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릴 적 오빠 옆에 늘 키가 훤칠한 사람이 금테 안경을 쓰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사람은 말수도 적고 매번 말을 건넬 때는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몇 번이고 다가가 보려 했으나 그의 차가운 기운으로 인해 가까이 갈 수가 없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성이 목씨였던 것 같은데?
그래서 한 번은 장난으로 나무 오빠라 불렀던 기억이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나무 오빠? ... 그럼?”
그 남자는 손을 내밀었다.
“난 목구빈이라고 해.”
아...
얼굴이 화끈거리는 나는 손을 내밀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방금은 죄송했어요...”
체면치레 말을 이어가려고 하던 그때 약을 바를 시간이 다가왔다.
허겁지겁 미안하다는 듯이 목구빈한테 고개를 숙이고 난 나는 안으로 들어섰다.
한참이 흘러 연고를 바르고 나온 내 어깨는 붕대로 잔뜩 감겨 있었고 붕대의 끝을 목에 걸었다.
모양이 웃기기만 하다.
연고를 가지고 나오자 짜증이 잔뜩 서려 있는 육하준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깨에 붕대가 감겨진 나를 보며 흠칫하던 육하준은 금세 얼굴이 차가워졌고 성큼성큼 걸어와 나를 잡아당기려 하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오지 마!”
육하준은 발길을 멈춘 뒤 화를 억누르고 있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유상미! 가서 사과해! 양윤설이 네가 사과하면 경찰에 신고하지 않겠대.”
그의 귀찮은 말투는 귀에 거슬리기만 했다.
“하루 종일 조용할 날이 없어! 정말 그냥 조용히 있으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