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다음 날 아침 깨어났을 때는 오전 아홉 시였다.
뻐근한 몸을 움직이며 세수를 했다.
간단하게 준비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더니 거실은 텅 비어 있었고 주방에는 누군가가 아침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앞으로 걸어가 보니 육운경이었다.
육운경은 나를 발견하고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기분이 언짢아진 나는 주방으로 가서 먹을 것을 가져왔다.
주방에는 음식이 없었고 그저 식은 죽과 마른 빵 몇 조각만 남아 있었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냉장고를 열어 우유 한 잔을 데운 뒤 계란 두 개를 부쳤다.
음식을 들고 부엌으로 나가자 육운경은 대낮에 귀신을 본 듯한 얼굴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육운경은 내가 들고 있던 음식들을 가리켰다.
“밥할 줄도 알아?”
의심스러운 말투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말투는 평온했다.
“계란 하나 부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육운경은 정신을 차린 뒤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수작 부리지 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우유를 내려놓았다.
육운경은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적반하장으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뭐? 나하고 싸우자는 거야?”
나는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는 싸늘하게 답했다.
“미친 거 아니야!”
육운경은 앳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다.
“누가 미쳤다는 거야! 유상미! 퇴원했다고 아주 눈에 보이는 게 없지! 난 형하고 교은 누나를 대신해 널 감시하러 온 거야! 형하고 누나 사이에 끼어들 생각하지 마.”
헛웃음이 나온다!
육운경은 그런 내 반응이 의아한 모양이었다.
“뭘 웃어? 난 진지해! 이번에는 절대 누나를 다치게 하지 않을 거야. 어디 명문 집안 아가씨 위세를 떨칠 생각하지도 마. 교은 누나야 널 무서워하겠지만 난 하나도 안 무서워.”
난 손을 내밀었다.
“좋아, 돈 놔.”
진교은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비아냥거렸다.
“돈? 무슨 돈? 돈밖에 모르는 속물이 따로 없어! 우리 집안에 시집온 게 돈 때문이었지! 염치도 없어!”
나는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내가 염치가 없어. 그러니까 돈 내놔.”
육운경은 말귀를 못 알아듣는 나를 보며 노발대발했다.
“돈이라니? 무슨 돈을 말하는 거야?”
나는 썩소를 지었다.
“무슨 돈이라니? 나같이 속물적인 여자가 너네 육진 그룹에 투자한 천억 현금을 말하는 거야.”
육운경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나는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5년 전에 현금으로 천억을 줬었으니까 그 투자금대로라면 나한테 배당을 챙겨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빌려준 돈이라 치고 5년 동안의 원금과 이자를 합치면 얼마나 될까?”
나는 휴대폰의 계산기를 두드렸다.
“액수에 따라 11에서 12포인트는 줘야 할 건데... 쯧쯧...”
육운경의 잘생긴 앳된 얼굴은 빨개져 있었다.
뭔가를 욕하려고 단어를 찾는 듯했으나 무용지물이었다.
그런 그의 뜨거운 시선 아래에서 나는 아침을 즐겁게 먹어버렸다.
입술을 닦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육운경은 그제서야 말을 꺼냈다.
“유상미! 대체 뭐 하려는 거야?”
고개를 돌려 기억 속과 전혀 다른 얼굴을 보며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전에는 항상 날 상미 누나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육운경은 벼락을 맞은 듯했다.
제자리 멍하니 서 있는 그를 뒤로하고 나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
힘드네.
밥 먹는 게 뭐가 이리 피곤한지...
육하준을 떠나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지고 있다.
나는 도소희한테 전화를 걸었다.
도소희는 기운 없는 어조로 전화를 받았다.
“우리 아가씨께서 무슨 일일까? 육하준하고 화해한 거야?”
나는 부인했다.
“아니.”
“아아!”
전화 건너로 도소희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뭐? 뭐라고?”
나는 귀에서 휴대폰을 멀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육하준하고 화해하지 않았다고.”
도소희는 금방 진정해졌다.
“한동안 차갑게 대할 거야? 아니지. 육하준은 전갈남이라 그런 방법은 안 통해. 네가 그 남자를 이기지 못한다고. 다른 방법 구사해.”
나는 한숨이 쉬어졌다.
“진짜 화해하고 싶은 마음 없어.”
통화 중은 도소희의 목소리가 더욱 의아해졌다.
“그럼 어쩌려고? 아! 그럼! 이 기회에 진교은을 살해하려고?”
그녀는 초조해졌다.
“상미야! 살인은 범죄야! 우리 법을 어겨서는 안 돼!”
나는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서희야, 진교은을 어떻게 할 생각도 없어.”
도소희는 침이 목에 메인 듯했다.
한참이 흘러서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상미야, 그만 장난쳐. 뭐 하려는 건지 말해 봐. 네가 자살 시도 했다는 기사들이 쫙 깔렸어. 유씨네가 몇몇 언론의 대주주이고 네 오빠의 평판 또한 나쁘지 않으니까 망정이지 안 그러면 벌써 네티즌들한테 욕을 얻어먹었을 거야.”
나는 미간을 주무르며 말을 건넸다.
“소희야, 기억이 안 난다니까! 육하준이 날 못 믿는 건 둘째 치고 너도 날 못 믿어?”
난처해진 도소희는 헛웃음을 내지었다.
“일부러 기억을 잃은 척하는 줄 알고...”
어이가 없긴 해도 나는 곧 마음이 처량해졌다.
기억을 잃기 전에는 얼마나 요괴를 부렸길래 주위 사람들이 하나같이 나를 믿어주지 않는 걸까?
나는 기분이 꿀꿀해졌다.
“소희야, 휴가 내고 나하고 같이 밥 먹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상의하고 싶어.”
절친인 도소희는 항상 내 편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답을 했다.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난 입술을 깨물었다.
“육하준하고 이혼하고 싶어.”
도소희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
나하고 도소희는 커피숍을 만남 장소로 정했고 도소희는 물건 한가득을 챙겨왔다.
가방 안에는 해열패치, 체온계, 해열제, 감기약 등등 잔뜩 들어있었다.
나는 영문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건 왜 나한테 주는 거야?”
도소희는 잔소리를 하며 체온계를 뜯고 있었다.
“빨리 측정해 봐. 요즘 코로나에 걸린 사람이 수두룩하다던데 너도 걸린 건 아닌지 보게.”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체온계를 겨드랑이에 채고 미간을 찌푸렸다.
“열도 안 나. 그냥 머리만 다친 것뿐이야.”
도소희는 허벅지를 툭 치며 답했다.
“하긴! 어쩐지 왜 갑자기 육하준하고 이혼하겠다고 하더라.”
그녀는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알기나 해!”
그제서야 도소희가 왜 나한테 해열제를 사준 건지 이해가 되었다.
체온계를 꺼내고 난 나는 진지한 얼굴로 도소희를 바라보았다.
“내가 말한 대로 육하준하고 이혼하고 싶어.”
도소희는 그런 내 모습에 놀란 듯했다.
그녀가 움직이질 않고 멍해 있자 나도 그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2분 정도 흘렀을 무렵 도소희는 눈을 깜빡거렸다.
“알았으니까 그렇게 보지 마.”
나는 도소희를 풀어주었고 도소희는 휴대폰을 꺼내 나한테 보여주었다.
그녀가 음성 녹음을 누르자 안에서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흑흑흑! 소희야, 나 육하준하고 이혼할래! 날 전혀 사랑하지 않아. 육하준이 진교은 그 여우년한테 생일 선물을...”
이게 뭐지?
도소희는 이어서 녹음을 재생했다.
“소희야, 나 육하준 없이는 못 살아! 육하준 없으면 죽을 것 같단 말이야. 내 맘 알겠어?”
“내가 육하준을 엄청 사랑하나 봐. 흑흑흑... 소희야, 나 괴로워. 왜 이렇게 괴로운 걸까? 육하준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괴롭지도 않았겠지?”
“소희야, 나 힘들어. 육하준이 왜 내 전화를 안 받는 걸까? 이대로 내가 술에 취해 길거리에서 죽어도 전혀 아무렇지 않겠지?”
도소희는 착잡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상미야, 나도 네가 기억을 잃었다는 걸 알아, 그래서 네가 얼마나 육하준을 끔찍이 사랑했었는지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
나는 얼굴을 감싼 채로 반나절이 흘러서야 고개를 들었다.
“소희야, 이번엔 진심이야, 무조건 육하준하고 이혼하고 말 거라고.”
도소희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재차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손을 제지하고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더 안 들려줘도 돼. 하나도 재미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