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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사랑잊혀진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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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방에서 차 시동 소리가 들리고 있자 참지 못하고 창가로 기웃거렸더니 팔을 뻗어 진교은을 지켜주는 듯 끌어안고 있는 육하준이 눈에 들어왔다. 이심전심이라 해야 될지 육하준도 고개를 들어 2층을 힐끔했고 그렇게 우리는 눈빛이 마주쳤다. 육하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움찔거렸다. 나는 그저 무뚝뚝한 얼굴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육하준은 내가 이토록 조용할 줄은 생각지 못했었나 보다. “하준아?” 옆에서는 진교은이 다정하게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육하준의 시선을 따라 마침 창가에 비친 내 그림자를 보게 되었다. “하준아...” 진교은은 다소 가여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유상미 씨가 걱정되는 거면 들어가 봐. 나 혼자서 갈 수 있어.” 정신을 차린 육하준은 눈가의 감정을 감추고 무뚝뚝하게 답했다. “아니야. 가자.” 진교은은 고개를 살짝 들어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녀의 올라간 입꼬리를 발견했다. 나를 비웃고 있는 게 분명하다. 자기 남자도 제대로 돌보지 못할망정 자기 남자가 다른 여자한테 아첨하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마음이 아픈 건 아니지만 어딘가 답답하기만 했다. 나는 커튼을 쳐 버렸다. 차 시동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고 나는 감정을 추스른 뒤 내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역시나 물질적인 면에서는 어떠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었나 보다. 비록 결혼 전에도 집안에서 금의오식 생활을 했었지만 결혼 후의 큰 옷장에 옷과 가방들이 줄지어 늘어선 걸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옷장은 메아리를 칠 정도로 드넓었고 한정판 명품 가방과 고급스러운 옷들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하나하나 뒤적거리고 있었다. 수많은 가방들은 구매한 뒤 사용한 흔적이 하나 없었고 옷과 신발들도 명찰을 떼지 않은 참신한 모양이었다. 보석함은 지문으로 열리는 거였고 그 안에는 보석과 시계들이 가득했다. 5년 동안 그와 어떤 결혼 생활을 이어온 건지는 몰라도 적어도 육하준은 그리 쪼잔한 사람은 아닌가 보다. 마음이 놓이네. 육하준이 속이 좁은 사람이 아니면 아마 이혼 후 재산을 너그러이 나눠 줄 것이다. 옷장은 크고 물건이 하도 많아 차마 전부 정리할 수가 없으니 일단 일상복 몇 벌에다 비싸 보이는 장신구와 2억 정도에 달하는 여성용 시계들을 챙겼다. 방으로 돌아가 쉬려던 그때 검정색 큰 가방을 걷어차게 되었다. 호기심이 생겨 열어봤더니 그 안에 물건들로 인해 부끄러움이 온몸을 휘감았다. 안에는 개봉하지 않은 여러 벌의 유니폼들이 들어 있었다... 제복, 토끼 경관 복장, 사무직 레이디 복장, 한복 그리고 로리타까지... 한 벌 한 벌 뒤적일수록 얼굴은 점점 더 화근거렸다. 육하준이 날 속인 건 아니었네! 기억을 잃기 전에는 미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고 놀았던 거야? “하, 유상미, 이런 것들로 우리 결혼을 만회할 생각인 거야?” 뒤에서는 싸늘한 비아냥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 머리에 타격을 입은 육하준은 끙하는 소리와 함께 턱을 감싸 쥐었다. 나는 뒷걸음질 쳤다. “벌... 벌써 돌아왔어?” 육하준은 화가 치밀었다. “30분도 더 넘었는데 당연히 돌아왔지.” 시간이 참 빠르네. 육하준이 진교은을 데려다준 지 벌써 한 시간이 다 돼가는 거야? 나는 재빨리 봉지 안의 물건을 다시 밀어 넣었고 발길질로 먼 구석에 걷어찼다. 육하준은 눈빛이 심오해졌다. “유상미, 똑똑해졌네? 나하고 또 난리를 칠 줄 알았더니만.” 그는 천천히 다가와 내 허리를 감싸며 다정하게 달래고 있었다. “화 풀어. 나하고 진교은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야.” 입을 열려던 그때 그의 어깨에서 진교은의 향수 냄새가 느껴졌다. 토할 것만 같은 기분에 그를 세게 밀어버렸다. “멀리 떨어져.” 육하준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유상미! 적당히 해!” 나는 썩소를 지었다. “냄새가 역겨워. 다른 여자 향이 얼마나 짙은지 몰라서 그래. 이러고도 그 여자하고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고 할 거야?” 육하준은 자신의 어깨에 짙은 냄새를 맡아보며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설명을 하려했고 나는 이미 돌아선 지 오래였다. “오늘부터 따로 자.” 뒤에서는 육하준의 노기가 깃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상미! 그만했으면 됐잖아?” 나는 싸늘한 웃음을 터뜨렸다. “안 됐어.” 육하준은 내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고 그 힘으로 인해 나는 얼굴이 핏기를 잃어버렸다. “아파!”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 내 모습에 육하준은 힘을 풀어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실수로 향이 묻었나 봐. 진교은하고는 정말 아무런 사이 아니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육하준은 갑자기 나한테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몸이 으스스 떨리게 되자 본능적으로 그를 밀치려 애쓰고 있었다. 그의 호흡이 점차 거칠어지더니 내 몸을 손으로 더듬기 시작했다. 익숙한 행동으로 온몸에 간간이 전류가 흐르고 나조차도 호흡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복잡하던 그때 기억 조각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몸은 그의 손길로 인해 타협을 이루고 있었지만 마음속의 나는 울먹거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 몸은 참 줏대가 없어! 남은 의지로 버텨내며 그를 계속 밀치고 있었으나 육하준한테 있어서는 그저 부부간의 재미진 취미에 불과해 보였다. 그의 키스는 더욱 맹렬해졌고 조금씩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잠시 멍해진 상태로 그의 행동에 임하는 중이었다. 육하준은 한층 더 깊어진 키스를 퍼부었다. 천지를 뒤덮는 황홀함으로 인해 나는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잊어버린 듯했다. 그러다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나자 육하준이 나를 끌어안고 침대로 이동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겨우 남은 이성으로 그를 다시 거칠게 밀쳤다. “만지지 마!” 옷을 벗고 있던 육하준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노기가 미간에서 퍼지고 있던 그는 손을 위로 들어 곧 내리 떨어질 것만 같았다. 몸이 움찔해진 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비명을 질렀다. “때리지 마!” 공기가 정체되었다. 육하준의 손을 허공에서 뻣뻣해졌고 나도 정신이 흐리멍덩해졌다. 왜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지도 모르겠고 육하준이 왜 갑작스레 포악해진 건지도 이해가 안 된다. 그렇게 침대에 웅크려 있는 나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가여워 보이는 내 모습에 육하준의 노기도 금방 사라진 듯했다. 그는 침대 옆에서 뭐라 설명하려고 입을 뻥끗하더니 끝내 아무 말도 내뱉지 않았다. 난감해진 나는 이불로 몸을 감싸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가. 나가. 만지지 마.” 육하준은 입술을 움직였다. “... 쉬고 있어. 서재에 가서 잘게.” 그는 차가운 얼굴을 하고 방을 나섰고 서재의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은 다시 고요해졌다. 나는 나른해진 몸을 안고 침대에 그대로 누워버렸다. 등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머릿속은 송곳에 찔리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육하준은 날 싫어하면서 왜 자꾸 사람을 이렇게 못살게 구는 걸까? 그리고 분명 기억을 잃기 전에는 이 남자를 그토록 사랑했다면서 왜 그의 포악함을 두려워하는 걸까? 게다가 육하준은 나하고 왜 이혼하고 싶어 하지 않는 거지? 머리가 점점 더 지끈거리고 있다. 그렇게 나는 몽롱한 채로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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