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욕실의 물소리가 귓가로 들려오고 있자 나는 최대한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보수적인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육하준이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나는 어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맨 상체의 그는 하얀 목욕가운만 느슨하게 매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카락에서는 떨어져 내린 물방울들은 윤곽이 뚜렷한 볼을 따라 가슴을 타고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던 그때 육하준이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어색한 나머지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귓가로 속삭였다. “돌아왔으니까 이제 그만하고 얌전히 있어.” 그는 아기를 달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긴 했지만 이 몸은 솔직하게 반응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숨결을 피해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차갑게 내뱉었다. “육하준, 나 기억을 잃었어...” “하.” 육하준은 내 허리를 감싸며 가느다란 허리선을 더듬기 시작했고 목소리는 나른하고 권태로워 보였다. “유상미, 귀찮지도 않아? 그만하라니까.” 갑자기 치솟아 오르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나는 그를 밀쳐버렸다. “뭘 그만해? 2층에서 떨어져 3일 동안 입원해 있었는데 언제 한 번 날 봐주러 온 적 있어?” 육하준은 그저 무덤덤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뭐?”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예전의 내가 아무리 얄미웠다고 한들 육하준의 회사를 살린 사람은 나인데 그것만으로도 죽었는지 살았는지 적어도 날 보러 와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왜 이렇게 평온한 모습을 내보이며 마치 나만 정신 나간 미친년이 된 것만 같지? 눈앞에 있는 준수한 외모를 보며 나는 난생처음 역겹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손을 내흔들었다. “아니야. 육하준, 우리 이혼해.” 육하준은 되레 웃음을 터뜨렸다. “유상미, 또 그 소리야? 내가 말했었지. 이혼은 안 된다고! 너도 진교은을 질투할 필요 없어. 네가 영원히 넘볼 수 없는 여신이거든.” 구역질이 나는 나는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육하준, 귀먹었어? 내가 기억을 잃었다고! 더는 널 사랑하지 않는다니까! 우리 이혼해.” 나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진교은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니까 그 여자 때문에 이혼하자는 거 아니야.” 육하준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로 내 손목을 잡더니 벽으로 밀쳤다. 고통이 밀려온 나는 눈시울이 재차 빨개졌다. 나하고 가까이에 있는 육하준의 뜨거운 호흡은 그대로 느껴지고 있었고 내 얼굴은 또 못난 채로 빨개져 있었다. 그의 가슴은 나를 향하고 있으니 크고 건장한 몸뚱아리가 나를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은은한 편백나무 향과 그의 숨결에서 좋은 향이 느껴지고 있었다. 몸은 다시 한번 나를 배신하고 있었고 다리마저 나른해지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에는 온통 육하준의 고운 입술에 입맞춤을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육하준은 재차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번에는 내 귓가를 살짝 깨물었고 온몸에 전기가 통한 듯 나는 몸이 떨렸다. “유상미, 그렇게 말하면 내가 화낼 줄 알았나 보지. 네가 진교은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지난 2년 동안 내 앞에서 미친 듯이 진교은을 욕한 건 그럼 뭔데? 그 정도로 진교은이 신경 쓰인다는 거 아니야?” 나는 이를 악물었다. “육하준! 이거 놔!” 육하준은 벌하듯이 내 귓불을 재차 깨물었다. “왜 이렇게 촌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거야? 소장하고 있던 유니폰은 어디에 있어? 항상 내가 샤워하고 나올 때마다 처음 보는 유니폼으로 갈아입고는... 털레비전에서 나오는 동작들을 따라하며 유혹했었잖아.” 그의 숨결이 점차 거칠어져 가고 있었다. “벌써 3일 째야. 상미야...” 나는 두피가 저려오고 목이 바싹 말라왔다. 스물여섯 살의 얼굴을 하고 있으나 마음은 아직 열여덟 살의 앳된 어른이었다. 그런데 분명 육하준하고 사이가 엄청 틀어진 마당에 부부생활은 이토록 방탕했었던 건가? 설마 내가 주도한 거 아니야? 미치겠네! 모질게 육하준을 밀어내고 나자 육하준은 돌발스런 행동으로 인해 하마터면 땅에 넘어질 뻔했다. 그의 눈빛은 금세 어두워졌다. “지금 날 밀쳤어? 뭐 잘못 먹었어?” 나는 더는 이 사람하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문을 박차고 나와버렸다. “밥 먹으러 내려갈 거야.” ...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밥상에는 푸짐한 음식이 풍성하게 차려져 있었다. 육하준이 출장을 갔다는 말과는 다르게 그의 음식까지 준비돼 있는 것이었다. 위에 놓인 음식들을 쭉 둘러봤더니 전부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이 아니라 육하준이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 하... 어이가 없네. 긴 시간을 뒤척이느라 배가 고팠던 나는 자리에 앉아 혼자 밥을 먹기 시작했다. 한참이 흘러 육하준이 내려왔다. 방금의 일로 인해 화가 난 모양이었다. 육하준은 나하고 멀리 떨어져 앉아 나한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고 나 또한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서로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일들이 있는 두 사람은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분위기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육하준이 불쑥 말을 건넸다. “아주머니, 오늘은 된장국 없어요?” 처음에 나를 마중 나왔던 하인이 바로 이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는 나를 힐끔하더니 원망스런 어조로 말을 내뱉고 있었다. “아가씨가 오늘 준비하지 않아서 없어요. 대표님, 제 탓하시면 안 돼요.”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나는 고개를 들어 그 아주머니한테 되물었다. “아주머니, 그게 지금 무슨 말이에요? 찌개를 끓이는 게 언제 제 일이었나요? 그걸 지금 절 탓하고 계세요?” 육하준은 젓가락을 ‘탁’ 하고 내려놓으며 싸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에는 계속 네가 해왔었잖아! 아주머니는 그걸 할 줄 몰라.” 화가 치밀어 오른 나는 그릇을 내려놓고 우아하게 입을 닦았다. “이봐요. 저는 당신의 사모님이지 하인이 아니거든. 그리고 밥상에 당신이 좋아하는 요리들로 풍성하게 차려져 있는데 이걸로도 부족해? 굳이 내가 만드는 걸 먹어야겠어? 내가 왜? 너한테 빚진 거라도 있어?” 육하준은 내 말에 당황스러운 듯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눈빛에는 혐오감과 충격이 곁들어 있었다. “유상미! 그깟 찌개로 날 비하할 생각하지 마. 나한테 해 먹이겠다고 유명한 요리사를 찾아가 배운 사람은 너야. 그런데 왜 갑자기 안 하겠다는 건데?” “아직 화가 덜 풀린 거면 혼자서 삭힐 것이지 밥상에서 그만 난동 부려.”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돼? 육하준! 난 이제 더는 네 시중을 안 들어!” 그렇게 냅킨을 뿌리치고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잘난 체만하는 이기적이기도 하지! 정말 지긋지긋하네! 대체 애초에는 눈이 얼마나 멀었길래 이토록 쓰레기 같은 남자를 좋아했던 거야! 육하준은 내가 자리를 박차고 떠날 줄은 몰랐었나 보다. 그는 정신이 멍해졌다. 아주머니는 옆에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전에는 아가씨가 직접 대표님의 밥상을 한가득 차려줬었는데 갑자기 때려치우다니... 참...” 울분을 꾹 참고 있던 그때 초인종 소리가 울리자 나는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이 가게 되었고 왕 아주머니는 벌써 문을 열러 걸어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림자가 우아하게 걸어 들어왔다. 그 사람은 예쁘게 생긴 이목구비에 재단한 연청색 롱드레스와 새하얀 목에 진주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워낙 기질이 좋아 얌전한 모습과 어우러지자 마치 생동감 넘치는 수채화에 흡사했다. 여자인 나로서도 질투할 만한 자였다. 그녀는 육하준한테 곧장 걸어가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하준아, 내가 괜히 폐를 끼치는 건 아니지?” 육하준의 싸늘했던 얼굴은 금세 부드럽게 변해져 갔다. 그는 자연스레 그녀의 손에 들린 물건을 받아들며 깨끗한 슬리퍼 한 켤레를 찾아주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세상 할 말이 없었다. 내 남편이 자신이 먹고 싶어하는 찌개를 먹지 못해 눈을 부라리더니 밖에 있는 예쁜 여자한테는 허리를 구부리며 신발을 신겨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