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병원에서 이틀을 쉬고 난 뒤 도소희는 날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나는 도소희를 따라나서고 싶었는데 도소희는 차 문을 잠가버리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냥 들어가. 이따가 기억을 회복하고 나면 어차피 울며불며 육하준한테 빌붙으러 올 건데 난 나쁜 사람 되기 싫어.”
그녀의 혀를 내두르는 모습으로 보아 아마 지난 몇 년 동안 내 연애로 인해 큰 화를 입은 게 분명해 보였다.
난 도소희의 차가 떠나는 모습을 배웅하고 나서 얼굴을 찡그리며 큼직한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
큰 집안이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벽에 빼곡히 늘어선 결혼사진을 보아하니 잘못 온 것 같지는 않았다.
하인으로 보이는 한 아주머니가 걸어와 내 짐을 들어주고 있다.
“아가씨, 대표님은 오늘 출장 가셨어요. 저녁은 혼자 드셔야 할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하인이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아... 아가씨, 대표님이 왜 안 돌아오는지 안 물어보세요?”
나는 의아한 감이 들었다.
“출장 갔다면서요?”
하인은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렇긴 한데 전에는 그 말들을 믿지 않았었잖아요.”
조금 귀찮은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안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제가 먹을 걸로만 준비해 줘요. 먼저 올라가 볼게요.”
내가 위로 올라가고 있는 뒤로 하인이 혼자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상하네. 왜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 같지...”
...
방에 돌아온 나는 서둘러 샤워를 했다.
워낙 결벽이 심한 나로서는 병원에서 잘 먹고 잘 자고 하긴 했지만 샤워를 할 수가 없으니 온몸이 불편했었다.
욕실의 따뜻한 온기만이 내 몸을 이완시킬 수 있다.
3일 동안 도소희의 악한 보탬으로 인해 나는 그동안 벌어졌던 일들을 대체적으로 잘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은 결혼을 한 상태다!
그것도 대학교 2학년 때 알게 된 도도남 남신인 육하준하고 결혼한 지 5년째다!
도소희의 설명으로 봤을 때 나는 육하준하고 7년 동안이나 얽혀 있는 관계다!
그러나 내 기억은 대학교 1학년 때 위풍당당했던 유씨네 가문 아가씨에서 멈춰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나는 젊고 아름다운데다 가정형편이 넉넉해 어릴 적부터 금의옥식이었고 나한테 구애하려는 남자들은 끝이 안 보일 정도로 줄을 서 있다.
도소희의 표현으로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부잣집 아가씨라는 자태를 반짝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2학년 때 연극단 활동을 하다 우연히 마주치게 된 육하준한테 반해 그한테 매달리는 강아지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내 대학교 생활은 온통 그가 부르면 언제든 나타나는 시종에 불과하다고 했다.
도소희는 마치 내가 귀신이 씌운 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고 한다. 분명 육하준 옆에 죽마고우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연녀라는 오명을 무릅쓴 채 열심히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다녔으니 말이다.
어찌 됐던 그런 나의 구애 공세로 남신인 육하준은 졸업을 앞두고 나의 청혼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렇다!
내가 육하준한테 청혼을 했다!
그렇게 제대로 된 결혼식도 치르지 못한 채 간단한 결혼사진 몇 장만 찍고 나는 그의 아내가 되었다.
결혼한 이후로는 육하준의 회사가 중요한 순간에 다다르자 그는 사업에 전념을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나도 그나마 정상적인 편이었는데 나중에는 육하준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도 했고 또 생활 곳곳에서 그가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아내게 되자 결혼 생활 내내 히스테리를 부렸다고 했다.
그 뒤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24시간 동안 육하준의 행적을 조사하고 다니고 심각한 경우에는 사설탐정까지 불러 육하준과 육하준의 첫사랑에 대해 샅샅이 조사했다고 한다.
아무튼 거액의 조사 끝에 난 육하준하고 첫사랑이 헤어진 내막을 듣게 되었었다.
참 비참했던 건 육하준은 가족과 회사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나를 이용 도구로 삼았다는 점이었다.
날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나랑 결혼한 뒤로는 그가 내 명의하에 있는 유성그룹의 자금을 빼돌렸다!
육진그룹은 그렇게 위기를 넘겼고 유성그룹은 그 일로 인해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되었다.
아버지는 화를 이기지 못해 뇌졸중으로 입원하셨고 가녀린 어머니는 심장병을 앓게 되었다.
그리고 항상 나를 아껴주던 오빠는 처음으로 나한테 따귀를 때렸었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내가 남편한테 모든 걸 다 가져다 바친다는 이유로 나는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비웃음을 얻게 되었다.
집안에서 버림을 당하게 되자 나는 열등감을 못 이기고 광기를 부렸다고 한다.
제대로 미쳐 있는 내 모습에 조금이나마 죄책감을 가질 줄 알았던 육하준은 나를 혐오하고 멀리했다고 한다.
게다가 외국에 나가 있는 그의 첫사랑은 그의 마음속에서 여신이라는 이미지를 남기게 되어 늘 연락을 주고받았었다고 한다.
하긴 그녀의 평온하고 잔잔한 생활들이 나의 처참한 결혼생활과 얼마나 비교가 됐겠는가!
그녀의 재능과 점점 더 높아져 가는 성취들이 멍청한 나를 돋보이게 했을 테니 말이다.
한 사람은 고고하기 짝이 없는 문학 여신이고 한 사람은 하루 종일 미쳐 있는 사모님이었으니!
아마 다른 남자였어도 그녀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그건 바로 나도 전에는 H시에서 가장 재능 있는 명문 집안의 아가씨였다는 걸 말이다.
난 종합 1등 실력으로 그 대학교에 들어갔었다!
그런데 육하준한테 미쳐 있는 동안 난 내 스스로를 잃어버린 거고 그녀는 외국에서 그의 애틋한 그리움을 만끽하고 있다.
마지막에는 사소한 일로 육하준하고 트러블이 생겨 옥상에서 뛰어내리겠다며 엄포를 놓았었다.
이제는 지겨울 대로 지겨워진 육하준은 곧바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버렸었고 난 절망감한 채로 2층에서 뛰어내렸다.
비록 머리를 다치긴 했어도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
...
모든 일들을 정리하고 났더니 나는 몸서리를 치게 되었다.
욕실의 물은 이미 식어 있었고 나는 얼른 일어나 몸을 닦은 뒤 목욕 가운을 챙겨 입었다.
거울 숙의 초췌한 얼굴에는 비정상적인 빨간 기운이 맴돌고 있었고 워낙 마른 몸으로 보아 영양부족인 듯했다.
이 나이에 있어야 할 통통한 볼살마저 없으니 말이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들여다볼수록 나는 이 일들이 진짜라는 걸 다시 깨닫게 되었다.
사랑에 미쳐 피도 안 섞인 사람 때문에 집안 사람들의 안위는 나몰라라 했었다니!
유상미! 너 제정신이야?
나는 홧김에 머리를 가격했고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제기랄! 부상을 입었다는 걸 깜빡했네!
그러던 중 욕실 문이 열리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고 엄숙한 얼굴을 하고 들어오는 육하준을 보게 되었다.
“당신...”
본능적으로 몸을 감싸고 난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얼굴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첫눈에 저도 모르게 몸이 떨리고 있었다.
익숙한 느낌으로 인해 눈살을 찌푸리게 되었다.
그러나 육하준한테 있어서 그녀의 반응은 그저 난리를 피우기 직전에 불과했다.
“유상미! 욕실에서 뭘 그리 오래 있어? 다 씻었으면 나올 것이지 내가 들어와 안고 나가길 기다리는 거야?”
그는 욕실물을 힐끗하고는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욕실에서 팔을 그으려던 건 아니지? 그만 좀 해.”
난 그의 시선을 따라 내 손에 가득 묻은 피를 발견하게 되었다.
머리에서 난 피라고 설명하려 했는데 육하준은 더는 들을 말이 없다는 식으로 욕실 가운을 들고 샤워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가 셔츠를 멋고 있는 걸 보자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뭐 하는 거야!”
난 얼른 몸을 돌렸고 얼굴은 이미 빨개져 있었다.
뒤로는 육하준의 비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샤워하려고 왜? 전에는 샤워할 때마다 들어와서 같이 샤워하자고 난리를 피우더니 뭘 부끄러운 척하고 있어?”
그 말에 얼굴이 더욱 화끈거리기도 하고 말 못 할 분노가 차올랐다.
난 ‘미친 거 아니냐’ 는 말만 남기고 욕실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