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한아연이 웃자 그녀의 커다란 두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입술도 우아한 곡선을 그렸다.
세상에서 제일 웃긴 이야긴데?
이천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자리에 오른 임은설은 자기 능력으로 성공한 줄 알고, 이천후를 걷어찬 다음 왕하중같은 인간을 선택했다는 거네.
“아가씨, 아무리 이천후가 뒤에서 몰래 도왔다 해도, 3년 동안 임은설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까요?”
한아연의 비서 한유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사무실 청소하는 아줌마 얼굴 여기에 점 있는 거 알아?”
한유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모르겠는데요?”
한아연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아줌마 매일 보잖아. 근데, 여기 점 있는 걸 모른다고?”
“아가씨, 그 두 가지가 무슨 상관이 있나요?”
“청소하는 아줌마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매일 만나도 아줌마 얼굴 특징을 모르지. 임은설도 마찬가지야. 그 여자 눈에 이천후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이천후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여자 눈에는 안 보여.”
“알 것 같네요.”
한유서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합작 파트너 건은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해야 것 같아?”
한유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임은설이 이천후를 걷어차는 순간, 은설 제약은 핵심 경쟁력을 잃은 셈이니, 우리가 은설 제약을 선택하는 건 아주 어리석은 선택이 되겠네요.”
한아연이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제일 먼저 탈락시킬 회사는 은설 제약!”
한아연의 말을 들은 한유서가 은설 제약의 자료를 쓰레기통에 넣으려고 했다.
“잠깐.”
한아연이 생각을 바꿨다.
“이천후한테 결정하게 하는 게 좋겠어. 자료 그 사람한테 가져다줘.”
........
연회가 곧 시작될 것 같아서, 임은설 일행은 앉을 자리를 찾았다.
그들은 왕하중의 안내로 운해의 여러 인물들과 인사할 수 있었다.
자리를 찾던 그들 눈에 이천후가 들어왔다.
“어쭈, 이천후 아니야?”
노미연이 말했다.
“초청장도 없이 어떻게 들어왔지?”
임은설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왕하중이 차갑게 말했다.
“가짜 초청장이 통했나 봅니다. 이런 인간들 정말 짜증 나요. 이쪽 사람도 아니면서 여긴 뭐 하러 오는 건지...”
“이런 인간을 왕 사장님하고 비교하다니... 그 바보 같은 여자는 도대체 뭘 믿고 이 인간을 두고 내기를 하는 건지 참...”
노미연이 없신여기며 말했다.
“거참 시끄럽게 떠드네.”
이천후가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떴다.
“뭐라고?”
노미연이 화를 내려 하는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스타 제약의 천 부장 전화였다.
그녀는 기대에 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천 부장님, 결과 나왔나요? 우리 은설 제약이 첫 번째 합작 파트너 맞죠?”
“은설 제약 탈락했습니다. 알려드려야겠기에 전화했습니다.”
전화기 저쪽에서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고, 자기 할 말을 마친 그는 이내 전화를 끊어버렸다.
“여보세요? 천 부장님, 잘못 아신 거... 여보세요?”
노미연은 전화를 내려놓은 후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옆에서 전화 내용을 똑똑히 들은 임은설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우리가 제일 유력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탈락이라니?
두 사람 다 이해할 수 없는 결과에 마음이 답답했다.
“왕 사장님, 인맥을 동원해서 저쪽에 말을 좀 넣어주시겠어요? 재고의 여지가 있는지...”
임은설은 왕하중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외에는 한씨 가문과 접촉할 수 있는 인물을 알지 못했다.
왕하중은 난감했다. 저도 한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 입을 열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하지만, 임은설 앞에서 체면을 구길 수는 없는지라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사촌 누나한테 전화를 한번 해보죠. 한아연한테 물어봐 줄지도 몰라요.”
“감사합니다.”
임은설이 감격해서 말했다.
왕하중이 전화기를 꺼내 들고 밖으로 나갔고, 임은설과 노미연도 따라 나갔다.
이때, 한유서가 이천후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자신을 소개하고, 은설 제약의 자료를 이천후에게 건네며, 자신이 온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이건 한씨 가문의 사업인데, 아무 상관도 없는 제가 결정해도 되나요?”
“아가씨가 그러라고 하네요. 저는 그냥 아가씨 말을 전하는 겁니다. 한씨 가문이 은설 제약과 협력을 할지 말지는 순전히 이천후 씨 손에 달렸습니다.”
한유서가 무표정한 얼굴로 설명했다.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이천후는 은설 제약 이름 옆에 X를 써넣으려고 펜을 들었다.
그러나 곧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은설 제약 이름 옆에 V를 써넣었다. 임은설이 소원을 성취한 다음 어떻게 일을 수습하는지 한번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이천후의 선택에 한유서는 깜짝 놀랐다. 은설 제약을 돕는다고? 임은설한테 쫓겨난 거 아니었어?
같은 시간 왕하중은 사촌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비록 강남회 회원이지만, 한아연을 본 적도 없고, 말을 건다는 건 생각지도 못할 일이라고 했다.
왕하중은 체면을 완전히 구겼다고 생각했지만,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임은설에게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사촌누나가 한아연한테 말은 한 번 해보겠대요.”
얼마 지나지 않아 노미연의 전화가 또 울렸다. 천 부장이 다시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노미연이 급히 전화를 받았다.
“내일 스타 제약 본사로 와서 계약하시지요.”
“네? 좀 전에 탈락했다고...”
“누가 은설 제약을 돕나 봅니다. 너무 많은 걸 물어보지는 마시고요. 그럼.”
천 부장이 전화를 끊었다.
노미연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곧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하... 은설아, 우리 은설 제약이 한씨 가문 합작 파트너로 뽑혔대.”
임은설이 놀란 표정으로 왕하중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 내 상상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왕하중도 어리둥절했다. 사촌 누나는 못 한다고 했다. 사촌 누나는 절대 아니다. 그럼 누구?
그러나, 자신을 숭배하는 임은설의 눈길에 기분이 좋아진 왕하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사촌 누나가 한 사장과 많이 친한가 보네요...”
신이 난 세 사람은 의기양양하게 다시 이천후가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노미연이 업신여기는 눈빛으로 이천후를 쳐다보았다.
“앉아 있는 모습이 참 한심하다. 우리 왕 사장님하고 어쩜 이리 다를까?”
“왜 또?”
이천후가 싱글벙글하고 있는 세 사람에게 물었다.
노미연이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방금 우리 은설 제약이 합작 파트너에서 탈락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왕 사장님 전화 한 통에 한 사장이 바로 생각을 바꿨다네. 우리 은설 제약이 합작 파트너로 최종 선정됐다는 소식이야.”
“왕 사장님의 능력이 이 정도 일 줄은 너도 몰랐을 거다. 너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지?”
임은설도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 사장님 정말 대단해요. 완전히 꺼진 희망을 이렇게 다시 살려놓다니...”
임은설은 이천후를 보고 계속 말을 이었다.
“내 선택이 맞았다는 것이 확실해졌네요.”
“당신 소원이 다 이루어졌으면 좋겠네!”
의기양양한 세 사람을 보며 이천후도 웃었다.
은설 제약의 대표 상품이 원재료 부족으로 생산이 불가능해져서, 계약을 이행할 수 없게 되면, 계약서에 명시한 10배의 위약금을 어떻게 물어낼지 아주 궁금해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