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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9화 꺼지라며

전기섭이 좋은 의도로 찾아온 게 아니라는 건 굳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전기섭은 전인그룹의 대외적인 상속자, 비록 그 진짜 정체는 막장 그 자체였지만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전씨 일가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자란 늦둥이 아들이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니 원하는 걸 손에 넣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 터, 그런 그가 한국에서 여자에게 차인 것도 모자라 그가 가장 경멸하는 사생아 조카와 사귄다니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갈만도 했다. 게다가 전동하는 전기섭을 감금하고 때리기까지 했으니 전동하에 대한 전기섭의 증오는 이미 극에 달해 있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뒤로 전기섭은 평소 인연을 맺고 지냈던 사업 파트너들과 함께 전동하의 미국 자산을 빼앗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돈도 전부 빼앗고 주가 조작으로 감옥에까지 처넣으려 했지만 언제부터 눈치를 챈 건지 오히려 전동하에게 반격을 당하고 말았다. 복수에 실패한 것도 모자라 자신과 친구들이 쏟아부은 투자금도 하루 아침에 휴지 조각이 되어 사라졌다. 전인그룹이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손해는 아니었지만 전기섭에 대한 주주들의 불만과 불신은 점점 더 몸집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 작전에 참여했던 친구들 중 두 사람은 아예 파산 직전까지 몰렸고 얼마 남지 않은 인맥이라도 건지기 위해 전기섭은 사비로 그 구멍을 메꿔줄 수밖에 없었다. 평생 돈 걱정이라곤 해보지 않은 전기섭이 처음으로 돈 때문에 골머리를 앓을 수 밖에 없던 시간이었다. 겨우 상황을 수습하고 다시 칼을 갈고 있던 전기섭에게 소은정이 미국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그의 어두운 욕망은 걷잡을 수 없이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은정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경멸이 다시 전기섭의 자존심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알코올의 기운이 전기섭의 마지막 이성을 끊어버리고 전기섭은 거칠게 호텔문을 열기 시작했다. “아니면 나랑 단둘이 마시고 싶은 거예요? 그냥 방에서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소은정... 오늘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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