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정원에서. 정가현은 팔짱을 낀 채 분수대 옆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바람을 쐬지 않는다면 그녀는 파티장의 역겨운 기운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가현!” 이때, 뒤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변서아가 기고만장하게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뭐야? 아직 덜 맞았어? 다시 때려줘?” 그녀는 싸늘한 눈빛을 보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잔뜩 약이 오른 변서아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정가현의 얼굴을 뜯어주고 싶었지만 계획을 위해 꾹 참는 수밖에 없었다. 변서아는 루이비통 핸드백에서 카드 한 장을 정가현에게 내밀며 베푸는 듯 말했다. “여기 오천만 원 들어있어. 네가 만약 더는 우리 오빠한테 질척대지 말고 부성시를 떠나겠다고 약속하면 이 돈은 네 꺼야.” 정가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건넨 카드를 바라보았다. 고작 오천만 원? 정가현의 머리카락도 살 수 없는 푼돈을 내밀며 부성시를 떠나라고? 하지만 변서아는 정가현이 마음이 흔들린 줄 알고 더욱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시설에서 자란 네가 이런 큰돈을 언제 봤겠어. 하지만 나한테는 그냥 일주일 치 용돈일 뿐이야. 너 이 돈 필요하잖아. 너 전에 우리 엄마한테 돈 빌려달라고 했던 거 기억나? 뭐 비록 우리 엄마가 빌려주지는 않았지만 지금이라도 내가 줄게. 이 돈만 있으면 넌 뭐든 살 수 있어. 어때? 흔들리지?” 변서아는 잔뜩 흥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빨리 받아라, 정가현. 변서아는 그녀가 이 돈을 반드시 받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혼 전 이민주는 정가현의 모든 생활비를 낚아챘고, 그 덕분에 그녀는 변씨 가문의 사모님이라는 신분에 걸맞지 않게 늘 싸구려 옷만 입고 다녔다. 그러니 거지 정가현은 반드시 이 돈을 받을 것이다. 만약 정가현이 카드를 받는다면 그녀는 파티가 끝나기 전에 카드를 도둑맞았는데 범인을 잡았다고 경찰에 신고할 계획이었다. 그러다 정가현이 경찰에 잡히면 그녀는 구치소 사람들을 매수하여 그녀를 한바탕 혼내준 뒤 전과까지 남겨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정가현은 평생 전과자로 빛을 볼 수 없게 된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흥분을 숨길 수 없었다. “받아. 아까 일은 나도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사과할게. 하지만 이번엔 나도 진심이니까 이 돈 꼭 받아줘. 너 돈 없잖아.” 정가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뭔가 눈치챈 듯 고개를 가로젓더니 휴대폰을 꺼내 유한진의 비서 하성훈에게 문자를 보냈다. [가방 속에 블랙카드가 있으니 지금 당장 은행에서 2억 인출해주세요. 저 지금 정원인데 빨리 움직이셔야 해요.] 상대는 거의 2초 만에 칼답을 보냈다. [네! 2분 내로 도착합니다.] 확고한 대답을 들은 정가현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분수대 위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그러자 다급해진 변서아는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야! 너 내 말 듣고 있어?” 정가현은 피곤한 듯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좀만 기다려.” “기다리라고?” 변서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너 지금 대체 뭘 기다려? 글쎄 네가 유한진한테 빌붙은 건 알겠는데 그 남자 기껏해야 널 갖고 노는 것뿐이야. 너 설마 유한진처럼 잘생기고 돈 많고 배경까지 좋은 남자가 너한테 반했다고 생각해?” 변서아가 괜히 정가현을 자극해 돈을 받도록 유도하고 있는 그때, 하성훈이 손에 검은 상자를 들고 나타나 허리 굽혀 인사했다. “말하신 물건 가져왔습니다.” 변서아는 낯선 남자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때 정가현은 몸을 일으키더니 하성훈이 내민 상자를 받아 들고 다시 시선을 변서아에게 돌린 채 싸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 다 했어? 이젠 내가 말할 차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