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깊은 밤, 빗소리가 창문을 두드렸다.
박진호는 잠에 들지 못했고, 식은땀에 잠옷이 흠뻑 젖었다.
옷을 벗자, 거울에 건장한 체격이 비췄다. 구릿빛 피부 곳곳에 오래된 상처가 가득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부상이 재발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그는 이미 익숙한 듯, 침대 머리맡 서랍을 열고 진통제 두 알을 꺼내 삼켰다.
그리고 아이들 방에 들러볼 생각에 밖으로 나가려는데, 아래층 부엌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 안, 심민아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계단 위에서 대려다 보는 박진호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죽 하나 끓이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 거야!”
...
다음 날 아침.
“한 번 먹어 봐. 위에 좋은 죽이야.”
심민아는 따끈한 죽 몇 그릇을 식탁에 놓으며, 박진호와 박지훈, 그리고 박수연을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바라봤다.
박지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눈가에 짙게 드리운 다크서클을 바라봤다.
“네가 직접 만든 거야?”
심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요리도 할 줄 알아?”
박수연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놀란 건 단지 요리를 할 줄 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엄마가 자신들을 위해 부엌에 들어갔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다. 전에는 이런 적이 전혀 없었으니까.
심민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냥 부엌에 들어가서 만드는 거지, 뭐가 그렇게 어려워.”
사실은 어젯밤, 이 죽을 만들겠다고 난리 치다가 냄비만 다섯 번 태워 먹었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 앞에서는 뭐든 다 해낼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박지훈은 눈앞에 놓인 죽 그릇을 밀쳐 냈다. 전혀 호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뭘 믿고 먹어. 꿍꿍이가 있는 게 뻔한데.”
죽을 밀쳐도, 심민아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어젯밤부터 이미 충분히 예상하던 반응이었지만, 막상 겪으니 마음 한구석이 쓸쓸하기는 했다.
“괜찮아...”
“낭비하지 말고 먹어.”
그녀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박진호가 죽 그릇을 다시 박지훈의 앞으로 밀었다.
박지훈은 곁눈질로 그를 보며 비꼬았다.
“아빠는 어젯밤 도둑질이라도 다녀왔어? 눈 주변이 시꺼멓네?”
박진호는 하품까지 하고 있는 심민아의 손목에 붙은 밴드를 보았다.
그리고 비서 한동욱에게 지시했다.
“영양사를 한 명 불러. 오늘부터 지훈이랑 수연이 식단을 전담해서 관리하도록 해.”
심민아는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참았다.
‘영양사를 부른다는 건, 내가 만든 음식을 믿지 못해서인가? 아니면 내가 음식에 독이라도 넣을까 봐 두려운 건가?’
그녀가 등을 돌려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박지훈은 곧 박진호의 의도를 간파했다.
“저 여자 다치니까 마음 아파서 영양사 부르라고 하는 거지.”
박진호는 대꾸하지 않았고, 대신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네 엄마가 네 생각해서 밤새 끓인 죽이니까, 한 입쯤은 먹어 봐.”
박지훈은 팔짱을 낀 채 인상을 쓰고 중얼댔다.
“내가 언제 해달라고 했다고. 밤새 죽 끓인 건 또 어떻게 아는 건데.”
거실에 아무도 없어진 걸 확인한 아이는 앞에 놓인 죽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진짜 못생겼다. 맛도 없어 보이고.”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그는 작은 숟가락으로 죽을 한 입 떠서 입으로 가져가려 했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도우미가 다가와 말했다.
“밖에 강소라라는 여자가 찾아와서 사모님을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박지훈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결국 예전과 똑같네. 방성훈, 강소라랑 어울리는 건 여전해.’
“하! 하마터면 그 여자 계략에 속아 넘어갈 뻔했네.”
박지훈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죽을 그릇째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창밖에 보이는 강소라의 얼굴을 흘끔거리더니 도우미에게 명령했다.
“개 풀어서 물어버려요.”
차가 막 차고에서 빠져나오려는데, 박진호는 강소라가 허둥지둥 자기 집 대문에서 도망치는 광경을 봤다.
그 뒤로는 사나운 도베르만 두 마리가 쫓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우스꽝스럽고 처참한 모습, 아들의 작품이라는 건 뻔했다.
박진호는 막아서지 않았다. 어차피 강소라는 당해도 싼 사람이니까.
“주식의 신 쪽에서 답장은 왔나?”
박진호가 문득 물었다.
‘주식의 신’이 움직인다는 소식은 전 재계를 뒤흔들고 있었다.
모두가 그와 손잡으려 애썼다. 그건 곧 주식시장을 선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회사의 주식 가치와 시세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다.
물론 박진 그룹의 주인이자,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박진호도 그를 포섭하고 싶었다.
한동욱이 보고했다.
“주식의 신이 저희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방성훈 대표와 손을 잡은 듯합니다.”
이 말을 듣자, 박진호의 눈썹이 서서히 찌푸려졌다.
‘주식의 신이 하필이면 방성훈 같은 쓸모없는 놈을 택하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