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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0화

여름은 멍하니 서 있었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얼굴이었다. ‘왜 이래 정말… 죽도록 때리기라도 해야 정신을 차리려나?’ 여름은 이제 평온하게 살 생각은 그만둬야 하나 싶었다. “저기… 운명이라는 걸 좀 받아들이도록 해. 어떤 상처는 괜찮다고 해서 정말 괜찮아지는 게 아니라고.” 여름은 하준의 그런 생각을 이성적으로 지워내려고 있는 힘껏 노력하고 있었다. “왜? 치료가 안 되면 어쩔 거야? 당신은 아무래도 이제 운명이랑 싸우지 말아야 될 것 같아. 정말….” 반짝반짝거리는 여름의 눈이 순진하게 빛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여름이 웬 불량 청소년을 계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하준은 온 정신을 집중해서 여름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갑자기 웃었다. 딱 몇 마디를 덧붙였다. “당신을 맛보고 나면 ‘운명 따위 다 엿이나 먹어라’ 하는 기분이 된다고.” 여름은 화가 났다. “내 의견은? 물어본 적은 있어? 당신은 괜찮은지 몰라도 나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용서할 생각도 없고. 예전에 당신이 내게 했던 비인간적인 짓을 생각해 봐.” “그래, 너무 비인간적이었지. 그래서 내가 남은 평생을 두고 갚으려고 해.” 하준이 자신이 얼마나 치사한지는 인정하지만 그 동안 여름을 놓아주고, 여름이 원하는 대로 해주려고 해 보았지만 매일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회사에서 일을 할 때도 불현듯 투지가 사라지기도 했다. “먹어. 이것만 먹으면 보내줄게.” 하준은 다시 새 피임약을 꺼내 여름의 손에 놓아주었다. 여름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양유진과 관계를 가지지도 않는데 굳이 먹을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양유진과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굳이 하준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여름은 약을 받아먹더니 웃었다. “먹으면 먹는 거지. 어쨌든 매일 하고 있으니 오늘 안 되면 다음에는 임신하게 될 테니까.” 순식간에 하준의 얼굴에 살기가 돌았다. 진작부터 그럴 것이라고 예상하고 피임약을 먹인 것이지만 직접 여름의 입으로 그런 말을 들으니 가슴에 커다랗게 구멍이 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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