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큰 눈이 내리던 어느 날, 배를 움켜쥐고 있는 도수영은 칼로 에는 듯한 고통이 촘촘히 전해오는 것을 느꼈다. 몇 번이고 땅에 넘어질 뻔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리퍼스 빌라의 문을 두드렸다.
"현진 씨, 제발 1억만 빌려줘! 민준이는 정말 현진 씨 아들이야! 민준이가 다시 수술하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라. 현준 씨, 제발 민준이를 살려줘!”
통증이 점점 심해진 도수영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녀는 허리를 곧게 펴려고 애썼지만 너무 아파서 등이 새우처럼 휘었다.
위암 말기의 아픔은 괴롭기만 했지만 도수영은 이를 악물고 굳게 닫힌 대문을 계속 두드렸다.
"현진 씨, 제발, 돈만 빌려준다면 현진 씨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어! 현진 씨, 제발...”
‘턱!’
별장 문이 열리는 소리에 절망으로 가득 찼던 도수영의 두 눈에 순간 희망이 피어났다.
"현진 씨가 날 만나준다고 했죠?”
무표정한 얼굴로 나온 별장 집사는 별장 대문에 팻말을 걸어놓고는 다시 힘껏 문을 걸어 잠갔다.
팻말에 적힌 글을 본 도수영은 갑자기 비틀거리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도수영과 개는 출입금지.’
‘하!’
도수영은 하염없이 울다가 그만 웃어버렸다. 사실 이 팻말도 그녀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유현진의 눈엔 도수영이 개 한 마리만도 못할 것이니 말이다.
유현진은 도수영이 악독한 여자라고 단정 지었다. 4년 전, 그녀는 유현진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를 버렸고, 부잣집인 경씨 가문에 시집가기 위해 그의 아이를 지우고 청부업자를 시켜 그의 다리를 부러뜨렸다고 알고 있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지만 유현진은 그녀의 설명을 믿지 않았다.
눈보라가 점점 세지고 눈이 섞인 찬바람이 도수영의 가슴으로 파고들며 살을 에는 듯 추위가 몰려왔다. 순간 그녀는 몸이 추운지 마음이 추운지 알 수 없었다.
마른 잎 몇 장이 그녀의 오른팔에 떨어졌고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왼손을 들어 올려 낙엽을 털어내려 했다. 문득 그녀는 자신이 왼손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떠올랐다.
임연아와 경진이 가둔 4년 동안, 그녀의 왼팔은 쓸 수 없게 되었다.
유현진은 지난 4년 동안 그녀가 도대체 무엇을 겪었는지 영원히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 자신도 감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피바다를 연상시키는 어두컴컴한 지옥이었고, 그녀의 마음속에는 더이상 빛이 없었다.
3일 후에야 도수영은 유현진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와 유현진은 부부였다.
그가 그녀를 위해 마련한 작은 아파트 이름도 ‘화류계’였다.
‘화류계...’
참 적절한 비유였다.
평소 유현진을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웠는데 유현진이 도수영을 괴롭히려고 할 때만 화류계에 와서 그녀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고 갔다.
그는 거칠게 그녀를 땅바닥에 밀치더니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조금 정리했다. 빳빳한 양복을 입은 그의 모습은 더 도도해 보였다.
눈빛 속의 검은 그림자가 사라지고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싸늘함만이 남았다.
비참한 몰골로 바닥에 쓰러진 도수영을 시큰둥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유현진이 입을 열었다.
“너는 연아가 아니야! 꺼져!”
위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낀 도수영은 힘껏 배를 눌렀지만 너무 아파서 입술이 떨렸다.
하지만 말기 암의 고통보다 마음의 고통이 더 크게 느껴졌다.
임연아...
그가 또 자신을 임연아로 착각했다.
그녀를 임연아로 상상해야만 그는 그녀와 함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토할 것 같다고 말이다.
예전의 유현준은 이렇지 않았다.
그때, 그녀는 유현준이 아끼는 소녀였다.
여러 가지 생각이 점점 되살아나자 도수영은 힘겹게 유현진의 앞으로 기어가 그의 손을 힘껏 잡았다.
“현진 씨, 우리 앞으로 잘 지내면 안 될까? 현진 씨, 당신이 나한테 오해가 많은 거 알아,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 4년 전, 내가 현진 씨와 헤어지게 된 것은 임연아가 우리 할머니를 납치했기 때문이야. 임연아는 할머니의 목숨으로...”
‘턱!’
도수영은 갑자기 목에 고통이 밀려왔다. 뼈마디가 분명한 유현진의 손이 그녀의 목을 힘껏 조르고 있어 남은 말을 도로 삼켜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