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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호락호락하지 않아

수지는 홀로 서 있었고 맞은편엔 하동국 가족 3인이 서서 팽팽한 신경전을 이뤘다. 이제 곧 폭발할 것 같은 싸늘한 분위기에 요양원의 다른 사람들도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야 이년아, 그 지분은 우리 집안 몫이야. 우리가 어머님 자식이고 윤아가 친손녀야. 생판 남남인 네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 지분을 차지하는 건데?” “할머니가 나 줬으니 이젠 내 거죠.” “그렇게 억울하면 가서 나 고소하던가요!” 수지는 계속 차가운 시선으로 김은경을 쳐다봤다. “왜요? 이젠 또 남남이 됐나요? 아까까진 엄마라고 하더니.” “진짜 배우 뺨치는 연기네요. 그 실력으로 연예계 진출해도 되겠어요.” “너!” “시끄러워!” 이때 하동국이 허리를 곧게 펴고 수지를 째려봤다. 20년 동안 키워준 딸이 오늘 처음 강압적이고 낯설게 느껴졌다. “수지야, 얼마를 원해? 차라리 속 시원히 말해봐. 우리가 널 줄곧 키워오다가 윤아가 돌아왔다고 내쫓는 건 어쩔 수 없게 됐어. 우리도 마지못해 내린 결정이야.” 그가 한결 부드러운 말투로 계속 말을 이었다. “윤아가 그동안 적잖게 고생했잖니. 너는 윤아 대신 우리 집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윤아가 받아야 할 사랑을 독차지했잖아.” “이제 우리 집에서 나가게 됐고 더는 우리와 아무 연관이 없으니 윤아에게 속하는 지분도 그만 돌려줄 때가 됐어.” “하동국 씨, 다시 한번 말하는데 지분은 할머니가 진작 나한테 양도하신 거예요. 절대 아무한테도 넘기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얼른 마음 접으세요.” “끝까지 지분을 안 돌려주겠다는 거네?” “네.” 하동국의 질문에 수지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잔뜩 화난 하동국은 가슴을 들썩거렸다. “그렇다면 이만 가봐. 앞으로 요양원 올 필요도 없어. 우리가 허락하지 않을 거야.” “지금 당장 어머니 퇴원 수속 해야겠어.” 이 말을 들은 수지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하동국 씨, 경고하는데 감히 할머니 퇴원시키기만 해봐요. 그땐 진짜 인정사정 안 볼 겁니다.” “뭐라고?” 수지는 쓴웃음을 지으며 김은경을 쳐다봤다. “김은경 씨 건강을 회복했다고 모든 게 끝난 줄 알았어요?” “내가 친딸이 아닌 걸 뻔히 알면서, 아니지! 아닌 걸 알았기에 마음 편히 십여 년 간 나를 수혈꾼으로 써먹은 거죠!” “아주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내게 수혈을 시켰는데, 그때부터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게 된 거잖아요.” 수지의 말에 김은경과 하동국은 화들짝 놀랐다. 둘은 공포에 휩싸인 눈길로 서로를 마주 봤다. 수지가 다 알고 있었다니. 그럼에도 20년 가까이 엄마, 아빠라고 불러온 그녀였다. 두 사람은 그제야 깨달았다. 연기를 논하려고 해도 둘은 절대 수지에게 상대가 안 됐다. “할머니는 반드시 요양원에 지내셔야 할 겁니다.” 수지가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만약 당신들이 제멋대로 퇴원 시킨다면 양딸을 수혈꾼으로 이용한 추악한 몰골들, 낱낱이 까발리는 수가 있어요.” 하동국과 김은경은 요 몇 년간 대외적으로 선행 이미지를 쌓아왔고 또한 수지와 함께 각종 연회에 참석하며 딸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줬다. 하씨 가문은 오성 갑부이니 화목한 가정과 선행 이미지까지 쌓아가야 회사 운영에 큰 도움을 줄 테니까. 이때 수지가 어린 시절부터 김은경의 수혈꾼이 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해버리면, 게다가 본인들 친딸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계속 이용했다는 걸 까발린다면 이들 부부의 이미지와 회사 이익까지 극심한 타격을 줄 것이다. 일개 노인네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다. 진짜 가당치도 않은 일이니까. “그리고 당신! 당장 가서 할머니께 사과드려요.” 수지는 턱을 치키고 차가운 시선으로 김은경에게 쏘아붙였다. 좀 전에 할머니를 놀라게 할까 봐 간호사더러 얼른 병실로 모셔가라고 했었다. 김은경이 제멋대로 유정숙에게 윽박지르던 태도를 수지가 절대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제대로 화난 김은경은 수지에게 갖은 욕설을 퍼부었고 수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 들어주었다. 욕설을 마친 후 수지가 휴대폰을 꺼내더니 방금 녹음본을 열었다. 곧이어 김은경의 갖은 욕설이 휴대폰에서 울려 퍼졌다. “X발, 감히 녹음해?!” 이때 하윤아가 험한 말을 내뱉으며 수지의 휴대폰을 낚아채려 했으나 수지가 먼저 그녀의 손목을 잡아서 그대로 꺾어버렸다. “으악, 아파!” “손목 부러졌어, 어떡해...” 이어서 수지가 또다시 손목을 잡아당겼고 하윤아는 너무 아픈 나머지 사색이 되었다. 수지는 그녀의 두 눈을 찌를 듯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경고하는데 나 건드리지 마라.” “X발 미친년이!” 찰싹... 끝내 수지가 하윤아에게 귀싸대기를 날렸다. “당신들이 친딸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니 양 언니인 내가 동생 교육을 제대로 해야겠네요.” “인간은 예의를 지켜야 해. 버럭버럭 소리 지르지 말고 입만 열면 험한 말 내뱉는 거, 그거 다 고쳐야 한다.” “너 계속 이런 식이면 다른 재벌가 자제들이 너랑 안 놀아줄지도 몰라.” “내 말 꼭 명심해.” “아무리 네가 하씨 가문의 친딸이어도 싹수가 없으면 다들 너랑 안 놀아.” 수지는 하윤아의 얼굴을 톡톡 치다가 김은경을 바라봤다. “이봐요 김은경 씨, 할머니께 가서 무릎 꿇고 사과드리지 않고 뭐 하는 거예요? 방금 윤아가 미쳐 발광한 영상을 SNS에 올려야 정신을 차리시겠어요?” “너!” “시간 없어요. 나 바쁜 사람이에요.” 수지가 김은경의 말을 잘랐다. “말했죠, 갈 데까지 간다면 피차 좋을 것 없다고요. 기어코 할머니로 날 약 올리게 하는 이유가 뭐예요?” “사과해.” 옆에 있던 하동국이 김은경을 툭 치면서 곁눈질했다. 오늘은 수지에게 제대로 걸린 듯싶었다. 그녀가 병실로 걸음을 옮기자 하동국 가족도 마지못해 따라갔다. 한편 임수빈은 가까운 곳에서 이 광경을 낱낱이 지켜보았다. 아쉽게도 말소리는 잘 안 들렸지만 분위기상 유정숙의 손녀가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닐 거란 짐작이 갔다. 임수빈은 문득 대표님이 방금 병실 문 앞에서 갑자기 선물 상자를 버리고 자리를 떠난 일이 생각났다. 아무래도 유정숙 어르신의 손녀분과 연관이 있을 듯싶었다. 그는 선물 상자를 들고 한참 고민하다가 끝내 유정숙의 병실로 향했다. ... 임수빈이 도착했을 때 김은경은 어르신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를 드리고 있었다. 옆에 있는 하동국은 표정이 한없이 짙어졌고 하윤아는 이를 악문 채 몰래 구시렁대고 있었다. 오직 수지만 착하고 얌전한 손녀가 되어 어르신을 달래고 있었다. “할머니, 김은경 씨도 이젠 사과드렸으니 앞으론 아무도 할머니를 못 건드릴 거예요. 여기서 편히 지내시면 돼요. 제가 나중에 자주 뵈러 올게요.” 수지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손목에 낀 빨간색 팔찌를 풀어 할머니께 착용해드렸다. 그건 평안을 기리는 팔찌였다. “이건 제가 현곡사에 가서 스님께 받아온 팔찌예요. 할머니 평안을 기리게 해드릴 거예요.” “이거 끼고 계시면 제가 할머니 옆에 꼭 붙어있는 거랑 같아요.” 유정숙은 평안을 기리는 팔찌를 내려다보다가 수지의 손을 꼭 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수지야, 내가 방금 너희 양 할아버지랑 약속했어. 당분간 너 그 집에서 지내야 할 거야.” “...” 수지는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러니까 유정숙은 방에 돌아온 후 혼자 있는 틈을 타서 또다시 수지를 위해 선뜻 결정을 내리신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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