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아빠, 엄마, 저 유학 갈게요.”
딸이 마침내 마음을 바꿔 유학을 가겠다고 하자, 멀리 해외에 있는 부모님은 드디어 걱정을 덜어낸 듯 목소리에 안도감이 가득했다.
“시아야, 드디어 네가 생각을 정리했네. 아빠랑 엄마는 드디어 걱정을 내려놓게 됐구나! 그동안 준비하고 있어. 아빠랑 엄마가 바로 준비할 테니까 한 달 후면 우리 가족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두 사람의 밝고 흥겨운 목소리와는 달리, 이시아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담담했다.
“알겠어요.”
몇 마디 형식적인 인사를 나눈 후, 전화는 끊겼다. 창밖은 깜깜했다. 이시아는 불을 켜지 않았다. 약간 붉어진 눈가에서는 별다른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반 시간쯤 지나자,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시아는 예전처럼 일어나 마중 나가지 않고, 그저 머리 위에 켜진 눈부신 백열등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신발을 갈아 신고 거실로 들어온 뒤에야, 한서준은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는 이시아를 발견하고는 살짝 눈을 들어 한마디 물었다.
“왜 아직도 안 잔 거야?”
“기다리고 있었어. 내가 보낸 메시지 못 봤어?”
그녀의 말투가 썩 좋지는 않았지만, 한서준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이유를 하나 둘러댔다.
“오늘 하루 종일 실험실에 있어서, 휴대폰 볼 시간이 없었어.”
그렇게 말한 뒤, 그는 그녀가 믿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외투를 벗어두고 바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왔고, 그가 아무렇게나 테이블 위에 놓아둔 휴대폰도 울리기 시작했다.
낮에 들었던 말들이 떠오르자, 이시아의 겹쳐져 있던 손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살짝 몸을 숙여 여전히 울리고 있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입력해 화면을 열었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분홍색 토끼 아이콘을 프로필로 한 ‘희주’라는 닉네임의 여자였다.
[서준아, 오늘 대접해 줘서 정말 고마워!]
[나 이제 집에 도착했어!]
이 친근한 말투를 보며, 이시아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위로 밀었다. 어젯밤 9시에 보낸 기록이었다.
[나 오늘 귀국해. 마중 나와 줄 수 있어?]
두 개의 메시지 사이에 시간 표시가 없는 걸로 보아, 바로 답장했음을 알 수 있었다.
[주소.]
어젯밤에도 한서준은 저녁 8시 50분에 돌아와서 샤워를 했고, 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왔다.
그 시간에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던 거였구나.
이시아의 속눈썹이 살짝 떨렸고, 그녀는 입술을 오므렸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화면에서 나와 ‘이시아’라고 저장된 프로필 사진을 클릭했다.
오늘 비 온다며 우산 챙기라는 메시지부터, 점심시간에 보낸 휴식 알림, 슈퍼마켓 카트 사진 몇 장, 그리고 길가에서 우연히 찍은 귀여운 강아지 사진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두 흰색의 대화창과 촘촘히 이어진 수십 개의 메시지들이었다.
전부 그녀가 보낸 메시지들이었고, 그는 단 한 번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비교해 보니, 그녀는 그저 이름뿐인 여자친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얼마나 비참한지 새삼 느껴졌다.
떠나기로 결심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모든 것을 깨달은 이시아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휴대폰을 제자리에 내려놓고,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복잡했다.
이시아는 한서준을 처음 만났던 그 장면을 떠올렸다.
대학교 1학년 입학식에서 그는 신입생 대표로 무대에 올라 연설을 했다. 잘생긴 얼굴 덕분에 단 1분 만에 고백 랭킹 1위를 차지했고, 교내 최고 인기남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를 쫓는 여자들이 줄을 섰고, 하나같이 그를 차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태생적으로 차가운 성격이라, 학교에서 가장 예쁜 여학생조차 거들떠보지 않았고, 많은 여학생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
그에게 일편단심인 이시아도 역시 그에게 거절당했지만, 그녀는 다른 여학생들보다 훨씬 더 끈질겼다. 거절이 더 혹독할수록 오히려 더 집요하게 매달렸다.
아마도 하늘이 그녀의 진심을 저버리지 않은 것일까, 1년 동안 노력한 끝에 고백만 서른 번 가까이했고, 마침내 그녀는 한서준의 정식 여자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사귀고 나서도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따뜻하지 않았다. 여전히 예전처럼 메시지에 답하지 않고, 전화도 받지도 않았으며,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
바라던 바를 이룬 이시아는 그의 차가운 태도에 상처받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이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심지어 연애 3년 차가 되었을 때, 그녀의 머릿속에는 한서준이 원래 성격이 차가운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다 얼마 전, 그녀의 노트북이 고장 나서 그의 컴퓨터를 빌려 쓰던 중, 우연히 한 폴더를 열게 되었다. 그 안에는 한 여자의 사진이 수천 장 들어 있었다...
이시아는 몰래 사진 한 장을 복사해서 몇몇 친한 친구들에게 물어본 끝에, 약간의 정보를 알아냈다.
한서준의 USB에 오랫동안 저장되어 있던 그 여자는, 그와 함께 자라난 소꿉친구 장희주이었다.
비록 비슷한 나이 또래 친구 몇 명이 함께 어울리곤 했지만, 그들 둘은 유독 친밀했다.
사람들 말로는 한서준이 장희주를 좋아해서 수능이 끝난 후 고백하려 했지만, 그녀의 우린 영원히 친한 친구라는 한마디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고 했다.
그 후 장희주는 집안의 계획에 따라 유학을 떠났고, 한서준은 한성대에 입학하면서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지게 되었다.
이 모든 걸 알고 나서야 이시아는 그가 원래 차가운 성격이 아니라, 단지 그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사람이 없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난 보름 동안 그녀는 혼란 속에서 지내며, 계속해서 그에게 장희주를 정말 잊었는지 물어볼 기회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는 우연히 또 다른 소식을 듣게 되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말하길, 한서준이 그녀와 사귀기로 한 이유는 단지 장희주를 잊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새로운 사랑을 통해 장희주로 가득 찬 마음을 채우려 했다는 것이었다.
장희주만 없었다면, 이시아는 10년이 걸리더라도 그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 의지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언제나 그의 공개된 유일한 연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희주의 존재를 알게 된 후, 3년 동안 냉대를 받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이시아는 처음으로 지쳐서 놓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더 이상 한서준이 누군가를 잊기 위한 도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또한 마음속에 언제나 첫사랑만을 간직한 남자를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비밀로 하고, 완전히 떠나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