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온유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그를 쳐다봤다. 원래 그를 바라볼 때면 반짝반짝 빛나던 눈동자인데 이젠 모든 빛이 사라지고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소란?
기가 막힌 단어 선택이었다.
“우진아, 넌 대체 감정이라는 게 있기는 해?”
온유나는 소파에 앉아 도우미의 보호를 받는 하은별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네 눈엔 쟤가 영원히 순진하고 착한 사람으로밖에 안 보이지? 널 구해준 생명의 은인? 절대 아니야. 쟤가 날 호수에 밀어 넣고 내 아이까지 해친 살인마라고! 넌 지금 네 아이를 죽인 범인을 옹호하고 있어. 알아?”
눈물 한 방울이 바닥에 떨어져 영롱한 빛을 내뿜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만 소란 피운다고?!”
그녀의 눈동자에 빛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고 오직 증오와 원한으로 가득 찼다.
말을 들은 성우진이 구겼던 미간을 더 세게 찌푸렸다.
이때 소파에서 연고를 다 바른 하은별이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변명에 나섰다.
“온유나, 헛소리 작작 해. 여긴 성씨 저택이야. 네 멋대로 저격하는 곳이 아니라고. 난 그 누구보다 당당해. 뒤에서 몰래 나쁜 짓 꾸미는 거 절대 그럴 일 없고 아예 그런 생각조차 안 해. 네가 오빠 동정심 유발하려고 혼자 쇼하면서 호수에 빠진 거잖아. 인제 와서 억울한 나한테 뒤집어씌우는 거야?”
“어떻게 입만 벌리면 거짓말이지? 난 너랑 아무런 원한 맺은 것도 없고 너한테 뭐 노린 것도 전혀 없어. 내가 널 밀쳐서 얻는 게 뭐야? 정 그렇게 네가 싫었다면 피하면 그뿐이지. 굳이 범법행위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하은별은 곧이어 성우진을 쳐다봤다.
“오빠, 절대 얘 말 믿으면 안 돼요. 죄다 거짓말이에요.”
성우진은 깊은 사색에 잠겨서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한편 하은별을 지켜주던 도우미가 살기 어린 눈길로 온유나를 째려보며 그녀 몸에 구멍이라도 뚫을 기세였다.
“도련님, 실은 그때 은별 아가씨께서 매화꽃을 감상하다가 몇 송이 꺾어서 도련님 서재를 꾸며줄 생각이었어요. 근데 이제 막 뒷마당 정자로 갔는데 유나 씨가 호숫물에 빠지는 거예요. 은별 아가씨는 아예 가까이 다가간 적도 없어요. 수심이 어느 정도인지 뻔히 알면서도 스스로 일어나지 않고 물 안에서 허우적대기만 하는 거예요 유나 씨가. 그 사이에 도우미 한 명이 구명조끼까지 건네면서 끌어오려고 했는데 꿈쩍도 하지 않더라고요. 도련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는 모양이었어요.”
온유나는 대신 앞장 서주는 그 도우미를 빤히 쳐다봤다.
그자는 하정은이 하은별을 데리고 성씨 저택에 돌아올 때부터 줄곧 그녀를 보살핀 사람이라 지금 이렇게 편들어주는 것도 전혀 이상할 건 없다.
어떤 상황에서든 습관적으로 주인을 보호하기 마련이고 주인을 옹호하는 마음이 보통이 아니다.
하은별이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곧 울음을 터트릴 기세였다.
“오빠, 유나 아빠가 올해 초에 돌아가시고 온성 그룹은 지금 유나 삼촌이 독차지하고 있어요. 온유나 이젠 더 이상 온씨 가문 장녀가 아니라고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을 잃었고 수중에 더는 갑질할 자본이 없어요. 오빠만 꽉 잡고 있어야 성씨 가문 작은 사모님이라는 명분이라도 지켜낼 수 있겠죠.”
“이 명분을 위해서 아직 형태를 갖추지도 못한 배 속의 아기를 빌미로 삼아 오빠의 동정을 유발하려고 했어요. 두 사람 어쨌거나 결혼한 지도 3년이 됐으니 정이 남아있겠죠. 온유나는 아이로 동정심을 유발하는 동시에 두 사람 이혼하면 이 일을 빌미로 더 많은 양육비를 챙길 수도 있고 나랑 양엄마 사이를 이간질하려던 수작이었어요.”
“내가 진짜 오빠한테 딴마음이 있었다면 이 집에서 지낸 4년 동안 양엄마와의 관계를 통해서라도 손쉽게 오빠한테 접근했겠죠. 뭣 하러 그 많은 짓거리들을 했겠어요? 게다가 유나가 일찌감치 임신 사실을 알렸다면 다들 앞다투어 받들어 모시지 않았을까요?”
하은별의 말은 그토록 적절하면서도 일리가 있었다.
첫째로 온유나가 아이를 빌미로 사달을 벌인 걸 질책하고 둘째로 자신의 무고함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듣고 있던 온유나까지 하마터면 믿을 판이었다.
이어서 하은별이 속상하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고작 2개월이라고요?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그 아이만 불쌍하죠 뭐.”
그녀는 온유나가 병원에서 받은 모든 진단서 내용을 알고 있기에 아이가 몇 개월 됐는지도 당연히 안다.
온유나는 문득 실소가 새어 나왔다. 일리 있는 말투와 제법 그럴싸한 표정까지 짓고 있으니 막상 온유나는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물론 그녀가 말을 한다고 해도 믿어줄 성우진이 아니지.
그와 결혼한 3년이란 시간을 되새겨보면 온유나는 단 한 번도 부모님의 신분과 배경으로 성씨 가문에서 갑질할 생각을 해본 적 없고 또한 그 누구도 이간질할 생각이 없었다. 하정은이 일부러 그녀를 사칭하려고 하은별을 데려온 걸 알고 있음에도 온유나는 전혀 하은별을 해친 적이 없다.
자살 소동을 벌이고 아이까지 유산하면서 더 많은 양육비를 받아내고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며 모함했다고? 그건 더더욱 가당치 않은 일이다. 자기 자식인데, 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벌일 수 있겠는가?
온유나는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입가에 차오른 말을 한 글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눈앞의 매정한 이 남자는 그녀가 한 말을 단 한 마디도 믿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다면 굳이 굴욕을 자초할 필요는 없겠지.
그녀는 양옆에 내려놓은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심장은 마치 은실에 얽힌 듯 마구 뒤엉켜버렸고 잠시 방심한 틈에 양 끝을 향해 매섭게 조여왔다. 이미 상처투성이가 된 그녀의 심장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더는 봉합할 수가 없었다.
“우진아, 지금 은별이가 한 말도 전부 믿는 거지?”
온유나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충혈된 두 눈으로 그의 싸늘한 눈동자를 마주했다.
이때 하은별을 지켜주던 도우미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도련님은 당연히 은별 아가씨를 믿죠! 그럼 설마 우리 아가씨를 제쳐두고 독해 빠진 유나 씨를 믿겠어요?”
온유나는 끝내 울화가 폭발하여 도우미를 차갑게 노려봤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끼어들어? 도우미 주제에!”
성우진은 아무 말 없이 미간을 찌푸렸고 눈가에 삭막함과 혐오감만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겨울의 매화가 한창 필 무렵, 아무 말 없이 등 돌린 그의 제스처가 모든 걸 말해줬다.
성우진은 온유나를 믿지 않는다.
하긴, 그녀는 성우진에게 악덕 와이프로 낙인되었는데 믿어줄 리가 있을까?
‘이건 너무 뻔한 대답이잖아.’
‘온유나, 대체 뭘 기대한 건데? 대체 뭐가 더 기대할 게 남은 건데?’
하지만 누가 또 생각이나 했을까? 평상시에 착한 일만 하는 성씨 가문 양딸이, 어릴 때 성우진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 하은별이 뒤에서 온갖 역겨운 짓을 일삼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예상할 리가 없고 또 그쪽으로 생각할 일도 없다.
그저 온유나만이 질투에 눈이 멀고 독한 마음을 품어서 남 좋은 꼴을 못 보는 인간으로 낙인됐다. 이건 어느덧 공공연한 사실로 되어버렸다.
그녀가 상처를 받으면 다들 천벌 받아 마땅한 거라고 아무도 가엽게 여기는 자가 없다.
온유나는 온몸에 기운이 쫙 빠지고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한참 후 성우진이 입을 열었다.
“유나야, 인제 그만 내 눈앞에서 사라져.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으니까.”
말을 마친 성우진은 고개도 안 돌리고 매정하게 별장을 떠나갔다.
온유나는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몸 곳곳에서 전해지는 고통을 꾹 참고 겨우 아래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씨 저택을 나서기도 전에 좀 전까지 연약해 빠졌던 하은별이 대뜸 딴 사람으로 바뀌어 거만한 자세로 그녀의 앞길을 막았다.
하은별은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깔깔대며 웃었다.
“유나야, 진짜 너처럼 멍청한 인간은 또 처음이네.”
하은별은 두 팔을 껴안고 얼굴에 핏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는데 지금 이 거만한 자태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