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이 점수만으로도 학교의 신기록을 경신할 수 있다.
전에 강천고 역대급 1등이라고 해도 절대 이 점수를 찍어보진 못했다.
수학 선생님의 넋 나간 표정에 강원우는 속으로 몰래 흡족의 미소를 날렸다.
그는 결국 선생님을 속이고 싶지 않아 나직이 말했다.
“더 높으면 높았지 이보다 낮을 순 없어요.”
강원우는 충격에 빠진 수학 선생님을 옆에 두고 물건을 정리한 후 쿨하게 자리를 떠났다.
“왜 그래요, 선생님? 무슨 일이길래 넋 놓고 있는 거예요?”
강원우가 나간 후 하도진이 물컵을 들고 교실에 들어왔는데 수학 선생님 김건형이 멍하니 넋을 놓고 제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김건형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그게... 말이죠. 하 선생님 반에 새로 온 전학생 말이에요. 원우 걔가 방금 답을 맞히고 갔는데 점수가 얼마나 나왔는지 알아요?”
“얼만데요?”
하도진이 궁금한 듯 물었다.
“적어도... 적어도 394점은 된대요.”
김건형이 과장된 표정으로 답했다.
순간 하도진은 손이 떨려서 물컵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장난이... 너무 심하시네요.”
이에 김건형이 연신 고개를 내저으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장난이라고 여겼지만 그의 정색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왠지 신빙성이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퇴직을 앞둔 수학 선생님이 굳이 이런 일로 장난칠 필요가 있을까?
오늘은 유난히 날씨가 좋았다. 밖에 나오자마자 따사로운 햇살이 얼굴을 비췄다.
강원우의 마음도 저 햇살처럼 따스했다. 그는 기대와 희열을 안고 공공버스에 올라탔다.
집에 돌아오니 멀리서부터 배진호와 고경표, 허지민이 마중을 나왔다. 세 사람은 함께 답을 맞히고 돌아온 모양이다.
“원우 넌 몇 점 나왔어?”
배진호가 먼저 질문을 건넸다.
“평상시보다 조금 높더라고.”
그는 딱히 점수를 공개하고 싶지 않았다. 일이 성사되기 전에는 널리 떠벌리지 말라고 했으니, 변수가 따를 수도 있으니 일단 함구했다.
고경표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를 보냈다.
“괜찮아. 4년제 대학에 붙는 건 문제 없을 거야.”
이때 허지민이 강원우를 힐긋 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다들 얘기 나누고 있어. 난 저녁에 주 선생님께 음악 레슨 받아야 해서.”
요즘 [시간]이라는 노래가 SNS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아름다운 선율과 심금을 울리는 가사 덕분에 큰 사랑을 받고 있는데 주기현마저도 이 곡을 만든 원작자는 분명 더 크게 발전할 거라고 단언했다.
하여 허지민도 요즘 이 곡을 배우고 있다.
작사, 작곡 전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해서 곡 하나에 배울 점이 너무 많았다.
가장 아쉬운 점이라면 애초에 가수가 녹음할 때 전문적인 장비를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약 제대로 된 녹음실에서 각 잡고 만들었다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릴 텐데.
말을 마친 허지민은 손을 흔들고 홀가분하게 자리를 떠났다.
강원우도 배진호, 고경표와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은 그를 초조하게 기다렸고 동생 강유라마저 쪽걸상에 앉아서 그를 쳐다봤다. 민수아가 그에게 음료수를 한 병 건넸고 강지한은 담배를 태우면서 최대한 담담한 어투로 물었다.
“예상 점수는 몇 점이야?”
옆에 있던 민수아는 바짝 긴장한 채 강원우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괜찮게 나왔어요. 너무 나쁘진 않을 것 같아요.”
강원우가 차분하게 대답하자 강지한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띠었다.
“전문대에 붙어도 우리 집안 경사야!”
민수아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아들이 명문대에 가는 건 아예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4년제 대학에 붙을 수만 있다면 여한이 없다.
다음날 이른 아침, 배진호가 집까지 찾아와서 오후에 있을 졸업파티에 잊지 말고 참석하라고 당부했다.
오후에 다 함께 노래방에 가서 실컷 놀고 저녁에는 공원 근처에서 삼겹살이나 구워 먹다가 미래의 나에게 편지 쓰기 등 의미 있는 졸업파티를 보낼 예정이었다.
한편 강원우의 등장에 애들은 딱히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비록 퇴학을 당했지만 그는 언제나 3반의 일원이니까.
노래방에 룸을 7개 정도 잡으니 학생 70여 명을 용납할 수 있었다.
두 반 학생들의 돈독한 우정을 과시하기 위하여 랜덤으로 아무 방이나 들어갔다.
같은 룸에 정해진 배진호와 강원우는 놀랍게도 간수연과 허지민을 마주치게 되었다.
학교퀸이나 다름없는 두 여학생은 예쁘고 다재다능하여 강진시 전일고의 레전드로 남게 됐다.
그런 여학생들이 동시에 한 룸에 들어오니 모두가 두 눈을 반짝였다.
아직은 고등학생이라 옷차림도 수수하지만 태생이 아름다운 외모를 지녀서 저 하늘의 가장 반짝이는 두 개의 별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그녀들을 바라보면 이제 곧 유행의 선두주자가 될 것만 같았다.
둘은 금세 이 룸의 연예인으로 거듭났고 특히 남학생들이 앞다투어 흑기사가 되어주려고 했다.
차갑고 도도한 간수연에 비해 상냥하고 친절한 허지민이 좀 더 인기를 끌었다.
허지민은 어딜 가나 매력 발산을 하지만 간수연은 홀로 하늘을 나는 백조처럼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고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여학생들은 그녀를 질투하고 남학생들은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볼 뿐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
간수연도 원래 차가운 성격인지라 이를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주위를 쭉 둘러보다가 강원우가 앉은 구석 자리가 제일 조용한 것 같아서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강원우는 가볍게 웃으면서 그녀를 위해 더 많은 공간을 내주었다.
두 명의 여신이 강림한 이 룸은 분위기가 고조로 올라갔다.
허지민이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자 떠들썩하던 룸 안이 삽시에 조용해졌다.
[빛바랜 추억]이라는 노래에 많은 학생들이 슬픔에 젖었다.
짧디짧은 고등학교 시절이 이렇게 지나가고 이제 곧 흩어져서 미래를 위해 분투해야 한다...
그녀의 노래를 시작으로 다들 한 곡씩 뽐내기 시작했다. 유독 강원우와 간수연만 구석에서 묵묵히 듣다가 박수를 보냈다.
강원우가 노래를 안 부르는 건 딱히 문제 될 게 없었다. 평상시에도 거의 부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간수연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남학생들이 간수연에게 노래 한 곡 부르라고 외쳐댔다. 그녀의 노래 실력이 엄청 궁금했나 보다.
다만 간수연은 빨갛게 물든 얼굴로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대로 넘어갈 친구들이 아니지.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 난 여학생이 입을 열었다.
“수연이 노래 엄청 잘 불러. 근데 아는 곡이 [늘 푸른 하늘]밖에 없을걸. 너희 중 누가 수연이랑 같이 부를래?”
[늘 푸른 하늘]은 남녀가 같이 부르는 사랑 노래였다.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남학생들이 흥분을 금치 못했다.
이에 간수연도 더는 거절하지 못했다.
다들 졸업을 앞두고 간수연과 노래를 부르면서 인생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신청자가 너무 많으니 간수연은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마침내 배진호가 제안을 꺼냈다.
“이참에 그냥 주사위 던져서 가장 큰 숫자가 나오는 사람이 함께 부르는 게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