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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결혼식을 앞둔 박씨 가문은 매우 분주히 돌아쳤다. 밤이 깊어져도 거실에 불이 환히 켜져 있고 안해원은 가정부들에게 결혼용품을 다시 한번 체크하고 애들 신혼 방도 좀 더 예쁘게 장식하라고 명령했다. 위층 박이서의 방에도 잔잔한 불빛이 비쳤다. 그녀는 카펫에 앉아 그동안 박도준한테서 받은 선물들을 전부 커다란 박스에 넣어두었다. 곰 인형은 처음 박씨 가문에 왔을 때 박도준이 인사치레로 준 선물이다. 그때 두려움에 밤잠을 설치던 박이서는 몰래 그녀의 방으로 들어온 박도준 덕분에 단잠을 잘 수 있었다. 박도준은 곰 인형을 안고 그녀 옆에서 동화책을 읽어주면서 이 곰 인형이 오빠 분신이니 앞으로 오빠 대신 그녀를 지켜줄 거라고 말했었다. 무용 슈즈는 박이서가 춤을 배우기로 한 날, 박도준이 그녀를 격려하기 위해 일부러 해외에서 제작해온 것이다. 이 신발을 신으면 그녀가 무대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 될 거라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줬다. 유리구두는 박이서의 18살 생일날, 박도준이 친히 그녀에게 신겨준 선물이다. 이제 어엿한 소녀가 되었어도 앞으로 쭉 오빠에게 기대야 한다고 당부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녀는 이 선물들을 하나둘씩 상자에 넣고는 커다란 상자를 안고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거실은 이제 누가 봐도 결혼을 앞둔 장식으로 도배했고 이 집안에 새 식구가 들어온다고 박이서에게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박이서는 딱히 더 둘러보지 않고 상자를 들고서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때 마침 강씨 가문에서 돌아오는 박도준과 정면으로 마주쳐버렸다. 그는 박이서의 손에 든 커다란 상자를 보더니 가슴이 움찔거렸다. “어디 가?” “쓰레기 버리러.” 박이서는 담담하게 말하고 그를 스쳐지나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박이서!” 전혀 미련 없는 그녀의 뒷모습에 박도준은 덜컥 겁이 났다. 그 사건 이후로 박이서는 마치 딴 사람으로 변해버린 것만 같았다. 더는 춤을 출 수 없다는 통보에 분명 그와 대판 싸울 줄 알았는데 이상하리만큼 차분했고 심지어 그 차분함에 섬뜩해질 따름이었다. 박이서가 고개를 돌리자 남자가 말을 이었다. “우리 결혼식 날 네가 신부 들러리 해줘.” 박이서는 여전히 침착한 표정으로 깍듯이 대답했다. “강윤아는 이제 내 친구가 아니라 새언니잖아. 촌수를 따져도 신부 들러리는 내가 하는 게 마땅치 않아. 다른 사람으로 골라봐.” 말을 마친 그녀는 더는 뒤돌아보지 않고 매정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신부 들러리가 마땅치 않은 게 아니라 두 사람 결혼식 날이 바로 박이서가 이곳을 떠나는 날이었다. 결혼식 전날 밤. 박이서는 상자 하나를 들고 일부러 박정훈 부부의 방으로 찾아갔다. “아빠, 엄마.” 그녀는 자애로운 두 분을 보더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일 오빠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할 것 같아요.” “저희 친부모님께서 마침 내일 오전 항공권으로 끊어서 내일이면 떠나야 할 것 같아요.” 박정훈과 안해원은 서로 마주 보다가 놀란 듯이 물었다. “왜 이렇게 갑작스러워?” 이에 박이서는 웃으면서 고개를 내젓고는 옷 주머니에서 두꺼운 편지봉투를 꺼내 두 분께 드렸다. “갑작스럽긴요, 진작 떠났어야 했죠. 이건 제가 그동안 모은 돈이니 달갑게 받아주세요.” 박이서는 15년 동안 박씨 가문에서 키워준 은혜를 돈으로 갚고자 했다. 다만 박정훈 부부는 연신 고개를 내저으며 돈 봉투를 다시 그녀에게 내밀었다. “왜 그래, 정말...” 다만 박이서도 단호하게 다시 건네면서 꼭 받아달라고 말하고는 두 분께 큰절을 올렸다. 그녀는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계속 말을 이었다. “15년 동안 저를 키워주신 은혜, 평생 잊지 않을게요. 앞으론 엄마, 아빠 옆에 자주 있어 드리지 못할 테니 두 분 건강 꼭 챙기시고 만수무강하세요.” 결혼식 당일. 박도준은 슬슬 출발할 때가 되었지만 꿈쩍하지 않고 오히려 박이서의 문 앞만 서성거렸다.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고 있자니 심장이 꽉 조여왔다. 왠지 이대로 가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이대로 가면... 매우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오빠, 왜 그래?” 이때 박이서가 문을 열고 나와 가슴을 움켜쥔 박도준에게 물었다. 그녀의 싸늘한 눈빛과 냉정한 말투에 박도준은 다시 한번 심장이 옥죄여왔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박이서에게 물었다. “나랑 같이 갈까?” 박이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신랑 메이크업을 받는데 그녀가 따라가는 게 웬말일까? 강윤아와 얼마나 알콩달콩한 모습인지 또 가서 지켜보라는 걸까? 박이서는 무심코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는데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를 내저으며 박도준에게 말했다. “난 볼일 있어서 이따가 바로 예식장으로 갈게.” 박도준이 뭐라 더 말하려 할 때 아래층에서 안해원이 그를 다그쳤다. “도준아, 빨리 내려와야지. 예약 시간 놓치겠어.” 박이서의 거절과 부모님의 다그침에도 박도준은 끝까지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손으로 그녀의 방문만 붙잡고 있었다. 부모님의 재촉이 점점 거세지고 나서야 그도 마지못해 마음속의 두려움을 짓눌렀다. “예식 시작하기 전에 나한테 와. 할 얘기 있어.” 박이서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담담한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가 이럴수록 박도준은 더더욱 대답을 듣고 싶었다. “아주 중요한 일이야. 꼭 와야 해!” 그는 지금 대답하지 않으면 아예 떠나지 않을 기세였다. 박이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거짓말을 둘러댔다. “알았어.” 박도준은 그제야 조금 안심한 듯 문을 가로막았던 손을 내리고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박도준이 차를 타고 떠나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의 차가 점점 멀어지다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박이서도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박도준, 결혼 축하해. 평생 보지 말자.” 말을 마친 그녀는 진작 정리한 캐리어를 들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이 집을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더없이 단호한 뒷모습으로 떠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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