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사흘 뒤, 박이서가 마침내 의식을 회복했다.
이번엔 박도준이 그녀 옆을 지켜주고 있었다. 수척해진 얼굴과 빨갛게 충혈된 두 눈으로 병상 옆을 지키다가 그녀가 깨어난 걸 보더니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얼른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
다만 박이서는 몸을 돌리면서 그의 손길을 피했다.
박도준은 허공에 손이 붕 뜬 채 한참 있다가 다시 거둬들였다.
그는 목이 메서 겨우 말을 내뱉었다.
“앞으로 정상적으로 걸어 다닐 순 있지만 춤은 더는 추기 힘들 거야.”
“무용은 관두면 돼. 내가 평생 먹여 살릴 테니까. 윤아는 내 약혼녀잖아. 걔를 내팽개칠 순 없었어.”
이런 통보를 들은 박이서는 수많은 감정이 휘몰아쳐야만 했다.
분노, 절망, 슬픔, 고통, 심지어 포효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감정이 가슴 속에 켜켜이 쌓이다 보니 끝내 무기력함으로 변해갔다.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겨우 말을 이었다.
“제발 좀 나가줄래.”
병실에 한참 동안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박도준은 결국 푹 쉬고 있으란 말과 함께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순간 글썽하게 고였던 눈물이 끝내 터지고 말았다.
춤을 추기 위해 종일 안무실에 몸을 담갔던 그 소녀는, 찜통더위에도 열심히 안무 연습만 하던 그 소녀는, 팀을 이끌고 더 높은 자리로 비상하겠다던 그 소녀는, 평생 춤과 함께 살고 싶다던 그 소녀는...
다리의 부상과 함께 미래가 와장창 무너졌다.
박이서의 꿈은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이제 더는 춤을 출 수 없다는 의사의 통보를 들은 이후로 박이서는 넋이 나간 채로 살아갔다.
울지도 웃지도 않고 그저 휠체어에 앉아 담요를 덮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무용단의 정식 공연일이 다가왔고 박이서는 박씨 가문의 반대도 무릅쓴 채 옆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공연장 맨 뒷좌석에 착석했다.
흐릿한 불빛 아래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지고 박이서도 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강윤아가 그녀의 무용 치마를 입고 그녀가 춰야 할 춤을 추고 있었다.
이어서 그녀가 받아야 할 박수갈채와 꽃다발이 죄다 강윤아에게 돌아갔다.
막이 내리고 모두가 일어나서 큰 박수를 보냈다. 박도준은 꽃다발을 안고 무대 위에 올라가 연인에게 입맞춤했고 다른 사람들도 강윤아에게 찬사를 보냈다.
오직 박이서만 담담하게 자리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았다.
한참 뒤, 박이서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녀를 본 박도준은 본능적으로 강윤아를 막아섰다.
“화낼 거면 나한테 화내. 윤아 다치게 하지 말고.”
박이서는 차분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 문득 눈가에 눈물이 서서히 고였다.
강윤아는 그런 박이서를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씩 올리고 도발하듯 웃었다. 곧이어 박도준의 옷깃을 잡아당기면서 또 일부러 가여운 척을 해댔다.
“도준 씨, 괜찮아. 다 내 탓이지 뭐. 이서 수석 자리도 빼앗고 이서가 짠 안무도 내가 추게 되었으니 화낼 만도 해.”
이에 박이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화난 거 아니야. 두 사람한테 줄 선물이 있거든.”
순간 모두가 놀라서 가슴이 움찔거렸다.
‘선물? 갑자기 웬 선물?’
“다들 나 따라와.”
박이서는 이 말을 마치고 공연장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따라 나왔을 때 마침 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이 꽃잎 모양으로 퍼지다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꽃잎 모양의 불꽃놀이가 하늘을 환하게 밝혔다.
박도준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이때 박이서가 그에게 말했다.
“기억나? 내가 수석 자리에 오르던 날, 도준 씨가 지금처럼 불꽃놀이를 해주면서 앞으로 내가 가는 길이 이 불꽃처럼 눈부시길 바란다고 했잖아. 이제 돌려줄게. 오빠도 새언니도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행복하게 살아.”
새언니라는 호칭에 박도준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박이서가 뭇사람들 앞에서 강윤아를 새언니라고 호칭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그는 가슴이 움찔거려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박이서는 어느덧 저 멀리 떠나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