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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육진우는 고개를 숙여 임시월이 건넨 명함을 내려다보더니 거절하지 않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미리 감사 인사 드리도록 하죠.” 말을 마치고 난 육진우는 자리를 떠나려 했고 임시월이 불쑥 말을 건넸다. “저... 저기 카카오톡 추가할까요? 채팅으로 직접 연락하면 훨씬 더 수월할 거잖아요.” 육진우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제 기억대로라면 임시월 씨는 고상준 씨하고 약혼을 앞두고 있는 거 아닌가요? 뭐가 그리 조급한 거예요?” 얼굴이 순식간에 돼지 간색으로 변한 임시월은 손바닥을 꽉 조이고 뭔가를 반박하려 했으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한참이 흘러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기요! 분수라도 챙기지 그래요! 제가 지금 고객을 그쪽한테 소개해 주고 있는 거잖아요. 굳이 임지연 그 촌뜨기 옆에 있을 거면 마음대로 하세요!” 육진우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임시월의 치졸한 속셈을 까발리지 않았다. “선의는 감사한테 필요 없어요.” 육진우가 자리를 떠나자 임시월은 화가 잔뜩 나 있었다. 그녀는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떠나가는 육진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첫 만남부터 그녀의 시선을 강탈한 이 남자는 외모만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온몸에서 귀티를 물씬 풍기는 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었다. 임씨네 저택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던 길, 육진우는 어르신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진우야, 해성시에는 무슨 일로 간 거야? 혹시 또 아버지랑 싸웠어?” 어르신은 온화한 어조로 관심을 표하고 있었고 육진우는 할머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아니에요. 해성시 쪽에 있는 거래처하고 상의할 게 있어서 잠깐 들른 거예요.” 어르신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육진우의 부모님은 일찌감치 이혼을 한 상태였고 어머니는 해외에, 아버지는 일로 집에 거의 돌아오지 않았었다. 그러다 육진우가 일곱 살 되던 해에 육진우 아버지는 네 살짜리 딸을 두고 있는 한 여자를 집에 데리고 들어왔었다. 그렇게 그 여자는 그의 계모가 되었었고 그 딸은 그의 여동생이 된 것이다. 그날 이후로 부자지간의 대화는 점점 줄어들었다. 평소에 의사소통을 안 하다 보니 사소한 일로도 두 사람은 자주 티격태격하곤 했었다. 어르신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몇 년 동안 병세가 점점 불안해졌던 어르신은 수많은 명의를 찾아봤는데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었고 유일하게 걱정을 하는 사람이 바로 육진우였다. “진우야, 너도 나이가 들었는데 좋은 여자 찾아서 결혼해야지.” 어르신은 자신이 혹시라도 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면 육진우 혼자 이 세상에 고독하게 덩그러니 남겨질까 근심이 되었다. “그래야죠.” 어르신의 재촉에도 육진우는 인내심 있게 부드러운 말투로 답했다. “해성시에서 어떤 여자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심성이 착하고 좋아 보여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정말이야?” 어르신은 살짝 흥분되어 있었다. 자신의 손자가 줄곧 냉담해 지금 스물여섯인데도 옆에 여자 하나 없었었다. “정말이에요. 제가 많이 좋아해요.” 육진우는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그래, 그래, 그래, 네가 좋으면 됐어. 콜록!” 몇 번의 기침으로 심정이 조금 가라앉은 어르신이 말을 이었다. “그럼 3일 뒤에 해성시로 찾아가마. 그 아이하고 같이 식사 자리 만들어. 우리 손자며느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네.” 어르신의 기침 소리에 육진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할머니, 몸도 편찮으신데 먼 길 오지 마세요. 해성시 일을 마치고 나서 제가 할머니 뵈러 갈게요.” “괜찮아. 해성시 일들을 처리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잖아. 기다리기 힘들어서 그래. 걱정하지 마. 네 아버지한테 공항까지 데려다 달라고 할게.” 어르신은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육진우는 설득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요. 떠나기 전에 연락하면 제가 데리러 갈게요.” 통화를 마치고 난 육진우는 임지연을 처음 만났던 그 상황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의 임지연은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에 만취가 되었으나 눈매는 유난히 맑았었다. 바로 그 눈빛 때문에 그도 임지연의 터무니없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임지연은 이른 아침부터 임건국의 강요에 단장을 하게 되었고 선물 한 봉지를 챙겨 황인호한테 사과를 하러 집을 나섰다. 그러나 황씨네 저택에 도착한 순간 경호원들을 그들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고 있었다. 황인호는 집에 없었다. 임건국은 집사님한테 몇십만 원을 챙겨주며 예의 있게 말을 건넸다. “저기 황 대표님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긴히 얘기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래요.” 집사가 답이 없자 임건국은 얼굴에 웃음을 머금었다. “저는 임건국이라고 하고요. 여긴 저희 딸인 임지연이에요. 저희 딸하고 임 대표님이 혼약이 있어서 오늘 특별히 찾아온 거예요.” 집사는 그 말에 임지연한테 경멸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마 그도 황인호하고 결혼하려는 여자들은 전부 돈을 노리고 찾아온 것이라 여기고 있는 듯했다. “대표님은 어젯밤 메이리후 클럽에 가셨어요. 오늘 점심에 다른 분하고 약속이 잡혀 있으니 아마도 정아 호텔로 갔을 거예요. 그리로 가 보세요.” 집사는 그 말만 남긴 채 문을 닫아버렸다. 메이리후는 해성시 가장 큰 클럽이었고 황인호가 어젯밤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보면 뭐 하러 간 건지 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전혀 개의치 않는 임건국은 황인호가 점심에 정아 호텔에 있다는 걸 듣고 즉시 임지연을 끌고 가려 했다. 가는 길 임건국은 백미러로 임지연을 힐끗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협박을 가했다. “이따가 황 대표를 만나고 나서 이상한 소리 지껄이기나 해 봐! 그냥 조용히 내 옆에 앉아만 있어. 이번 혼사만 정해지면 네 할아버지 병원비도 걱정이 없는 거야. 알아?” 임건국의 경고에 임지연은 입가에 썩소가 서렸다. 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방금 못 들었어요? 그 집사님이 황인호가 어젯밤 메이리후 클럽에 갔었다고 하잖아요. 거기가 무슨 장소인지 몰라서 그래요?” 임건국은 눈살을 찌푸렸다. “넌 계집애가 그런 곳을 알아서 뭐 해? 게다가 남자들이 그런 곳을 드나드는 게 뭐가 어때서?” 어이가 없는 임지연은 손바닥을 꽉 움켜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꽤 이른 시간에 정아 호텔 입구로 도착했고 황인호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11시가 되어 황인호가 싱글벙글해 하며 한 사람을 에워싸고 들어오고 있었다. 임건국은 임지연을 데리고 앞장섰다. “대표님, 어머 어떻게 우연스럽게도 여기서 다 만나요.” 황인호는 임건국의 목소리를 듣자 웃음이 어느 정도 사그라들었으나 손님이 있으니 발작할 수가 없었다. 그는 무뚝뚝한 어조로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시죠?” 임건국은 임지연을 밀쳐 황인호한테로 가까이 내보냈다. “다름이 아니라 지연이가 어젯밤 자기가 실수를 했다는 걸 알고 사과하러 온 거예요.” 황인호는 고개를 치켜올리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임지연의 아리따운 얼굴을 보고 나자 금세 기분이 풀리는 듯했다. 남자들은 워낙 시각적인 동물이라 임지연이 조금만 꾸미고 나면 세련된 도자기 인형에 흡사하니 누가 봐도 설렐 만한 것이다. “황 대표의 손님이었어요. 오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식사나 하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그 남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고 임지연은 그 남자가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곰곰이 기억을 회상해 보더니 순간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술집에서 육진우 옆에 앉아 있었던 그 남자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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