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임지연은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이 일에 무슨 꿍꿍이가 들어 있는 건가?
임시월은 더욱 득의만만한 미소를 띠었다.
“경제 위기에 빠진 임진 그룹을 고씨네 가문에서 도와줬었는데 턱부족이었어. 게다가 황성그룹의 대표인 황인호는 아내가 막 죽은 터라 외부의 구설수를 잠재우려면 급히 결혼할 여자가 필요했었거든. 그래서 그 사람이 아빠한테 우리 집안 딸 한 명하고 결혼하는 걸 동의만 해주면 이 고비를 넘겨주겠다고 했어.”
“상준 오빠가 이 일을 알고 나서 혹시라도 내가 그 집안에 시집갈까 봐 당장 너하고 혼약을 해지한 거야. 약혼녀도 나로 변경한 거고. 그래야 네가 그 집안에 시집을 갈 수가 있잖아.”
임시월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임지연의 안색은 어두워져만 갔다.
그녀는 고상준하고 왜 헤어지게 됐던 건지 궁금했었다.
처음에는 고상준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파혼을 할 거라고 여겼었는데 사실은 임시월 대신 그녀를 황인호한테 시집을 보내려고 파혼을 한 거라니...
1년 동안의 연애 기간들이 마치 웃음거리가 된 듯했다.
그러다 1년 내내 자신한테 살갑고도 다정하게 대했던 고상준의 부드러움을 떠올리고 나니 역겨운 기분마저 들었다!
임지연이 안색이 창백해지는 걸 확인한 임시월은 턱을 치켜올리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임지연! 내일 황인호가 혼담을 꺼내러 올 때까지 얌전히 집에 있어!”
말을 마치고 난 임시월은 승자의 자세로 방을 나갔다.
임지연은 눈빛이 흐려진 채로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었다.
심장이 움찔거리고 제대로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정도였다.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는 그녀는 억울함을 못 이기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인간이 이 정도로 비겁할 수가 있는 거였구나!
깊게 숨을 들이바쉬고 난 그녀는 눈빛이 점차 굳건해져 갔다.
나더러 황인호한테 시집을 가라고!
꿈 깨!
다음 날 아침.
임지연이 꿈나라에 있던 그때 밖에서 몇몇 사람들이 들어와 그녀를 침대에서 끌어내렸다.
정순자는 하인들을 지휘했다.
“예쁘게 단장해. 이따가 황 대표가 찾아올 거야.”
임지연은 강제로 거울 앞에 눌러앉게 되었고 스타일링, 메이크업이 순서대로 진행 되어갔다.
그녀는 우아한 보청색 치마를 입었다.
정순자는 잘 차려입은 임지연을 바라보며 눈 밑에 노기가 스쳐 지나갔다.
어쩜 시골에서 십여 년을 지냈는데도 이렇게 예쁠 수가 있는 거지!
뽀얀 피부에 붉은 입술을 하고 있는 임지연은 간단하게 단장을 했는데도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 천한 여편네하고 똑 닮았잖아!
허나 정순자는 금세 마음속의 분노를 억눌렀다.
임지연이 아무리 얼굴이 예쁘다 해도 황인호한테 시집을 가게 되면 받을 고통은 어마어마할 테니 말이다!
“다 끝냈으면 얼른 내려가! 황 대표가 이따가 도착할 거야. 앞으로 넌 그 사람 아내야!”
정순자는 임지연을 끌어당겼다.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임지연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정순자는 목소리를 낮추어 협박을 했다.
“할아버지 생각해야지.”
임지연은 어쩔 수 없이 순순히 따라나섰다.
할아버지는 장기부전으로 병세가 위독한 생태였고 그녀가 아무리 의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할아버지가 기계에 의지해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최근 몇 년 동안 그녀는 의술에 전념하고 있었다.
비록 의학적으로 많은 성과를 거둔 건 맞지만 지니고 있는 돈이 별로 없었다.
더군다나 할아버지가 병세가 위독해진 뒤로 임건국을 그리워했었던 터라 그녀는 할아버지를 데리고 해성시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임건국하고 정순자가 할아버지를 이용해 그녀를 협박할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임지연은 어색함을 무릅쓰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1층 거실.
임건국은 빙그레 미소를 보이며 한 남자와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 남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 늙어 보이는 게 마흔 살인데도 쉰 살이라 착각할 정도였다.
대머리, 기름진 얼굴, 불러온 배, 목에 걸린 굵고도 긴 금사슬, 팔목에 착용한 값비싼 시계 등등으로 보아 전형적인 졸부 차림이었다.
한눈에 봐도 부자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임건국은 정중한 자태로 아첨하고 있었다.
“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에는 꼭 만족하실 거예요.”
말을 하던 임건국은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고개를 돌려보았더니 임지연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임지연의 꽃단장에 눈이 반짝거렸다.
그는 임지연을 끌어당기며 소개를 했다.
“대표님, 여기 제 딸이에요. 임지연이라고 하고요.”
황인호는 작디작은 눈동자로 임지연을 훑어보고 있었고 역겨운 시선을 느낀 임지연은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임건국은 황인호의 눈빛을 알아차리고 임지연을 잡아당겨 황인호의 옆에 앉혔다.
황인호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심 아쉬운 태도로 임지연한테 떨어졌던 시선을 거둬들이며 헛기침을 했다.
“저는 마음에 드네요. 가능하다면 다음 주에 결혼 도장을 찍고 싶어요. 그리고 저는 재혼이라 결혼식을 성대하게 주최할 생각 없어요. 간단하게 가족끼리 식사나 하죠.”
임건국은 개의치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요. 성대하게 결혼식을 차리려고 해도 돈만 낭비하는 거잖아요. 절약이 미덕이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임건국의 아첨을 들으며 황인호는 더욱 환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임 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지연이하고 결혼하고 나면 임 대표가 제 장인인데 임진 그룹의 위기를 어떻게 그냥 내버려두겠어요. 혼인 신고만 하고 나면 당장 임진 그룹에 투자하도록 하죠.”
그 말을 듣고 나자 임건국의 입꼬리가 귓등에 걸릴 정도였다.
“그래요. 최대한 빨리 결혼 도장 찍도록 하죠.”
두 사람은 마치 그녀를 공식 석상의 판매 도구로 여기며 그녀의 의견 한 번 묻지 않고 있었다.
황인호는 말을 마치고 나서 통쾌하게 카드를 하나 꺼내놓았다.
“여기 안에 2억이 들어있어요. 예물로 치죠. 그리고 금붙이들은 내일 가져오도록 하죠. 걱정 마. 나한테 시집오게 되면 돈 걱정은 안 하고 살 거야.”
황인호는 임지연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아리따운 미인이 단정하게 소파에 앉아 있는데다 보청색의 롱드레스 차림으로 인해 예쁜 도자기 인형을 연상케 하고 있는 것이었다.
임지연은 그 카드를 거들떠보지 않으며 차갑게 말을 건넸다.
“난 결혼 안 해.”
서늘한 목소리에는 굳은 결심이 서려 있었다.
얼굴에 미소 가득이었던 임건국은 그 말을 듣고 나자 금세 얼굴이 굳어지더니 이를 악물며 나지막이 경고를 하고 있었다.
“임지연! 무슨 헛소리야! 네가 동의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야!”
임지연은 눈썹을 치켜올렸고 맑은 두 눈에는 서늘한 온기가 맴돌았다.
“저 결혼했어요.”
평온한 목소리로 나오는 말들은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임건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임지연! 이건 부모로서 너한테 명령하는 거야! 혼약을 맺은 이상 네가 싫다고 해도 소용없어! 그리고 이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는 게 터무니없다는 생각 안 들어?”
하긴!
이틀 전에 고상준하고 파혼을 했는데 이제 와서 결혼을 했다고 하고 있으니 누가 믿겠는가!
그러나 그녀는 확실히 육진우하고 혼인 신고를 마친 상태였다.
황인호는 안색이 어두워져 갔고 임건국은 즉시 그를 달래고 있었다.
“황 대표님, 얘가 헛소리하는 거예요! 결혼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걱정 마세요. 다음 주에 지연이하고 혼인 신고를 할 수 있을 거예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 쪽으로 자성을 띤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 아내를 데리고 뭘 한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