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구불구불한 복도를 걸으며 윤지현은 신경이 곤두서서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따라오는 사람이 없었다.
호텔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고 지나가는 직원조차 보이지 않았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불안했다.
꽤 오래 걸었지만 뒤따라오는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자 그제야 조금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아마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것일지도 몰랐다. 강혜경이 더러운 수를 쓸 작정이었다면 이미 예전부터 그랬을 것이다. 굳이 자신이 아들 곁을 떠나려는 이 시점에 무리수를 둘 필요는 없었다.
물론 위자료가 아까울 수는 있겠지만 그 정도 돈은 심씨 가문에게 아무것도 아닐 터였다.
강혜경은 그렇게까지 어리석지는 않을 것이다.
앞쪽에 보이는 복도를 지나 조금만 더 가면 아까 들어왔던 로비가 나온다.
윤지현은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7시 40분.
이제 거의 다 됐으니 진성주에게 연락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녀는 메시지를 적기 시작했다.
[저 도착했어요. 지금...]
하지만 메시지를 다 적기도 전에 복도 모퉁이에서 검은색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그녀는 윤지현에게 부딪히고는 사과를 했다.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
“괜찮아요. 저 정말 괜찮으니까, 신경 안...”
하지만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차가운 통증이 목덜미에서 느껴졌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밀어내고 시도했지만, 시야가 급격하게 흔들리며 어지러웠다.
여직원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걱정하는 척 오히려 더 꽉 붙잡았다.
“손님, 괜찮으세요? 혹시 어느 객실에서 묵고 계시나요? 아, 저쪽이군요. 그럼 제가 안전하게 모셔다드릴게요.”
그렇게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더니 윤지현을 억지로 부축하며 더 외진 복도로 끌고 갔다.
“살려...”
윤지현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속도가 너무나 빨라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주변은 점점 희미해졌고 마치 영혼이 깊은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누군가 제발 살려줘...’
이때 부딪힐 때 반사적으로 주머니에 넣었던 핸드폰이 떠올랐다. 핸드폰에는 아직 전송되지 않은 메시지가 있었고 그게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녀는 남은 기운을 다 끌어모아 축 처진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손끝은 거의 감각이 없었지만, 더듬더듬 화면을 눌러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눌렀다.
...
한편, 조도현은 방금 고객과 미팅을 끝내고 호텔 정원에서 잠시 눈을 감고 쉬고 있었다.
술을 조금 마셔서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산들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살짝 흩날렸다가 다시 이마에 내려앉았다.
이때 적막한 밤공기에 알람 음이 울렸다.
곁에 서 있던 진성주가 휴대폰을 확인했다. 윤지현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던 그는 메시지를 확인하자 미소를 지었지만 메시지를 보면 볼수록 미소가 사라졌다.
“도련님.”
“무슨 일이에요?”
조도현은 담담하게 물으며 눈을 천천히 떴다.
진성주는 휴대폰을 건네며 말했다.
“오늘 밤 8시에 윤지현 씨랑 만나기로 했는데 방금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두 단어가 너무 이상합니다. 도련님, 이게 무슨 뜻일지 한번 보세요.”
“...”
조도현은 진성주가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다는 사실에 어이없어 그를 한번 보고는 곧 메시지로 눈길을 돌렸다.
[저 도착했어요. 지금 살러둬”
‘살러둬?’
미간을 찌푸리며 곰곰이 생각하던 조도현의 눈에 순간 냉혹한 빛이 번뜩였다.
조도현은 영상 통화를 눌렀다.
진성주가 당황했다.
“도련님, 대체...”
조도현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진성주는 영문을 몰랐고 그 순간 영상 통화가 연결되었다.
화면 속은 어두운 주황빛에 뒤덮여 있었다. 자세히 들으니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질질 끌리는 신발 마찰음과 거친 숨소리가 끊어질 듯 말 듯하게 들려왔다.
“살...려...”
온 힘을 짜내듯 겨우 뱉은 목소리가 누군가에 의해 막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조도현은 차가운 표정으로 영상 통화를 끊고 말했다.
“윤지현 씨가 호텔에 왔는지 프런트에 물어봐 주세요.”
진성주는 서둘러 전화를 걸었고 곧 답변이 돌아왔다.
“저녁 7시쯤, 미모의 여성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누군가와 약속이 있다고 했고 정장 한 벌을 맡겼다는데 설명을 들어보면 윤지현 씨가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후로는 행방이 묘연합니다...”
조도현은 벌떡 일어섰다.
그는 침착하게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면서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어딘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방안은 조명이 희미했고 윤지현은 커다란 침대 위에 던져졌다.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은 헐렁한 수건 하나만 몸에 두른 채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침대 끝에는 소름 끼치는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그중에는 약물이 든 주사기도 있었다.
“안...돼... 제발...”
윤지현은 몰려오는 공포에 온몸이 떨렸다. 한쪽 팔로 짚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힘없이 고꾸라졌다.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윤지현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로 발버둥을 칠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미인이네.”
“이 몸매에 이 얼굴이면 완전히 끝내주네.”
“근데 남편이 진짜 악질이더라. 돈을 주면서 우리한테 갖고 놀라고 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망가뜨리라고 하잖아. 이런 미인을 아까워서 어떻게 그래?”
가짜 호텔 직원으로 위장했던 여자가 윤지현의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도장을 들고 침대로 다가왔다. 그녀는 윤지현의 손을 잡고는 말했다.
“남편이 이혼할 때 위자료를 주기 싫어서 그러지. 확실하게 망가뜨려 버리고 그 과정을 다 영상으로 남기라고 했어.”
...
윤지현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터져버릴 듯했다.
‘이... 이게 설마 심은우가 시킨 일이란 말이야? 아니, 그럴 리 없어!’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몸 여기저기를 더듬으며 휴대폰을 찾았다. 몇 번이나 놓쳐 바닥에 떨어뜨렸지만 기어가 간신히 집어 들고 그의 번호를 눌렀다.
직접 확인해야 했다. 그에게 직접 물어봐야 했다...
그녀가 휴대폰을 꺼내자 누군가 빼앗으려 했지만, 그 합의서를 쥐고 있던 여자가 막아섰다.
“전화하게 놔둬.”
신호가 갔지만, 심은우는 두 번이나 전화를 끊었다.
세 번째 시도 끝에야 연결되었지만 들려온 목소리는 심은우가 아니라 구서희였다.
“오빠가 언니 전화 받고 싶지 않대.”
말하며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언니를 위해 준비한 남자들은 마음에 들어? 살짝 말해줄게. 그 인간들은 단순히 변태적인 취향만 있는 게 아니라 그중 하나는 에이즈 환자야. 조금 있다가 분위기 살리려고 마약도 한 대 놔줄 거야. 그리고 내일이면 재밌는 영상이 인터넷에 퍼질 예정이야. 언니네 부모님, 가족, 친구들, 아는 사람 전부 다 보게 되면 언니가 함부로 몸을 놀리는 쓰레기라는 걸 알게 될 거야.”
구서희는 계속해서 말했다.
“아, 맞다. 축하할 일도 있어. 우리, 그러니까 나랑 은우 오빠는 내일 밤에 약혼 발표할 예정이거든. 언니는 돈 한 푼도 못 얻고 사람들한테 손가락질당할 거야.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없어. 여기 운성에서 우리 가문과 은우 오빠 집안이 언니를 없애는 건 그냥 개미 한 마리 밟아 죽이는 거랑 다를 바 없거든. 어때? 난 언니 남자를 빼앗고 아내도 가로챘고 이제는 완전히 짓밟으려고 해. 그런데 어쩌지? 난 앞으로도 쭉 행복할 거고 은우 오빠랑 서로 사랑하면서 잘 살 거야. 그리고 언니는 아무것도 못 해. 그저 절망 속에서 천천히 무너질 수밖에 없어. 하하하...”
구서희는 큰소리로 요란하게 비웃었다.
윤지현의 손에서 휴대폰이 힘없이 떨어졌다.
분노와 절망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가슴은 칼로 난도질당하는 듯했고 오장육부가 뒤틀려 찢겨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아프지 않았다. 울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오로지 일어설 수 있기만을 바랬다. 죽어서 귀신이 된다고 해도 기필코 그들을 죽여버릴 것이다.
“시작해. 봐주지 말고 마음껏 즐겨.”
침대 끝에 서 있던 여자가 카메라를 켜며 말했다.
여덟 명의 남자가 그녀를 둘러쌌다.
“꺼... 져...”
윤지현은 절망적으로 베개를 움켜쥐었지만 내던질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손목은 침대 헤드에 묶였고 다리도 제압당했다. 수많은 손이 그녀를 향해 뻗어오며 옷이 찢겨 나갔다...
뚱뚱하고 추악한 남자가 침대 위로 올라왔다. 손에 주사기를 들고 있는 그는 기괴하고 흥분된 표정이었다.
그가 주사기를 들고 그녀의 허벅지를 향해 내리꽂으려는 순간 윤지현은 눈을 감고 온 힘을 다해 혀를 깨물었다...
그때 문에서 자물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