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여윤아는 미리 골프장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터색 골프웨어를 입은 그녀는 굵은 컬이 들어간 긴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는데 활력 넘치고 매력적이며 분위기 있었다.
그녀는 윤지현을 살펴보면서 못 말린다는 듯이 말했다.
“차라리 목까지 다 가려버리지 그래?”
윤지현은 싱긋 웃었다.
“난 구직하려는 거잖아.”
윤지현은 자신의 착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푸른색의 골프웨어에 머리는 깔끔하게 높이 묶었으며 화장도 굉장히 옅었다. 깔끔하고 우아해서 좋았다.
“자기야, 남자는 시각적인 동물이야.”
“조도현 씨가 그냥 예쁘게 생긴 사람을 비서로 삼을 생각이었다면 지금까지 그 자리가 비어 있었을 리가 없지.”
“예쁘게 생긴 데다가 능력까지 있는 사람이 여기 있잖아.”
여윤아는 애교스럽게 그녀를 콕 찌르면서 말했다.
“내가 옷 한 벌 더 챙겨와서 다행이지. 우리 둘 사이즈 비슷하니까 내가 빌려줄게.”
여윤아는 다짜고짜 윤지현을 끌고 탈의실로 가더니 그녀에게 옷을 갈아입으라고 강요했다.
여윤아가 만날 기회를 마련해준 것이었기에 윤지현은 그녀의 호의를 거절하기 쉽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윤지현은 섹시한 고양이 같았다.
상의는 민소매에 핏한 스타일이었고 스커트는 검은색의 테니스 스커트였다. 윤지현의 우월한 몸매가 여실히 드러났다. 그녀의 길게 쭉 뻗은 흰 다리는 남자들의 혼을 쏙 빼놓을 정도였다.
“어머나!”
여윤아는 과장되게 입을 가리면서 말했다.
“자기 몸매 진짜 좋다. 심은우는 제 발로 복을 걷어차네. 구서희가 자기보다 나은 점이 뭐야?”
윤지현은 심은우와 구서희에 관한 얘기는 그냥 무시했다.
그녀는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거울을 바라봤다.
‘이렇게 입었는데... 혹시 내가 유혹하려고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아냐. 그래도...”
“쉿.”
여윤아는 윤지현을 향해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자신의 가방 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반 대표님, 조 대표님이랑 만나셨다고요? 네, 지금 바로 갈게요.”
결국 윤지현은 옷을 갈아입을 수 없었다.
그들은 반형서와의 약속 자리로 나갔다.
가는 길에 윤지현이 질문을 했다.
“혹시 조도현 씨 본 적 있어?”
“응. 한 번 본 적 있어. 나 여섯 살 때 설날에 부모님이랑 같이 조씨 가문에 방문한 적이 있었거든? 그때 조도현 씨는 피부도 하얗고 통통하고 말랑말랑하게 생겨서 아주 귀여웠어. 그런데 열 살 때 해외로 갔거든. 국내에 있을 때가 거의 없었어.”
“그렇구나...”
하얗고 통통하고 말랑말랑하다니... 윤지현의 머릿속에 따끈따끈한 호빵이 떠올랐다.
골프카트가 코너를 돌자 눈앞에 갑자기 넓은 잔디밭이 펼쳐졌다.
멀리 내다보니 숲과 호수가 보였고 가까운 곳에는 골프웨어를 입고 대화를 나누는 두 남자가 보였다.
윤지현은 그중 한 명을 보고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이비색 상의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은 사람은 반형서였고 그의 곁에는 그보다 10cm 정도 더 커 보이는 훤칠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흰색 옷을 입고 늘씬한 자태로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얇은 허리, 몸만 봐도 고귀하고 우아해 보였는데 옆태를 보니 마치 조각상처럼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고 너무 아름다워서 혼자 필터를 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윤지현은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그녀는 반형서를 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 그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은...
“조도현 씨네!”
귓가에서 여윤아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어릴 때랑 완전히 달라졌어. 어떻게 저렇게 훤칠해지고 잘생겨졌지? 세상에, 나 저런 얼굴이면 사족을 못 쓰는데.”
“미치겠네.”
“미치겠다고? 설마 조도현 씨에게 반한 거야? 혹시 사랑에 빠졌어?”
“...”
윤지현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골프카트가 멈춰 섰고 대화를 나누고 있던 두 남자는 여윤아와 윤지현을 발견했다.
반형서는 웃으면서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윤지현을 본 순간 그는 깜짝 놀란 듯했다.
조도현 또한 잠깐 놀란 듯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차가운 분위기를 내뿜었고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느낌을 주었다.
여윤아는 윤지현을 데리고 다가갔다.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희망은 없겠지만 그래도 한 번 노력해 보고 싶었다.
“반 대표님, 조 대표님.”
그들의 앞에 서게 된 여윤아는 반갑게 그들을 향해 인사를 건넨 뒤 서둘러 조도현을 향해 윤지현을 소개했다.
“이쪽은 제 친한 친구 윤지현이에요. 오늘 대단하신 조 대표님을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다고 해서 왔어요.”
윤지현은 매우 긴장했지만 겉으로는 침착하게 미소를 지었다.
반형서가 짓궂게 말했다.
“윤지현 씨가 왜 갑자기 골프를 치러 왔나 싶었는데 그런 이유 때문이었군요. 이렇게 예쁘게 꾸미고 온 게 사실은 조 대표님을 위해서였네요. 윤지현 씨는 생각보다 야망이 아주 큰 분이시네요.”
윤지현은 반형서의 조롱을 무시하고 그를 향해 인사를 건넨 뒤 조도현을 향해 아주 정중하게 말했다.
“조 대표님,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말을 마친 뒤 그녀는 약간의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평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라 실수했다.
“처음 뵙는다고요?”
조도현은 아주 덤덤한 눈빛으로 윤지현을 바라보았다.
“...”
윤지현은 아주 정중하면서도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사실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조도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척 능청스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만나 뵙게 되어 정말 기쁘네요.”
윤지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조금 긴장한 얼굴로 간절하게 조도현을 바라보았다.
‘제발 얘기하지 말아 줬으면...’
조도현은 그녀의 눈빛을 읽은 건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네. 정말 기뻐 보이네요.”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약간 길게 내뺀 끝 음에서 웃음기가 느껴졌다. 그가 내뱉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애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조도현의 미소에 반형서와 여윤아는 충격을 받았다.
‘뭐야? 벌써 넘어갔다고?’
여윤아는 윤지현을 향해 눈빛을 보냈다.
‘옷 갈아입은 거 좋은 선택이었지? 필살기는 쓰라고 있는 거라고.’
윤지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조도현이 일부러 조롱하느라 그렇게 말한다는 걸 몰랐다.
네 사람은 골프를 치기 시작했다.
조도현은 골프를 잘 쳤고 반형서도 실력이 나쁘지 않았다. 여윤아와 윤지현도 골프를 치긴 했지만 실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기에 그냥 기분만 냈다.
그렇게 골프를 치다가 네 사람은 휴게실로 쉬러 갔다.
여윤아는 윤지현에게 조도현과 단둘이 있을 기회를 마련해주기 위해 일부러 반형서에게 새로운 골프채를 골라달라고 하고 그를 데리고 매장으로 향했다.
조도현은 자리에 앉았고 윤지현은 그의 비위를 맞추려는 듯 얼른 그에게 물을 건넸다.
조도현은 그녀의 손을 몇 초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가 무안하지 않게 물을 건네받았다.
그러나 마시지는 않고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윤지현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실패네.’
“처음 뵙는 윤지현 씨, 날 만나고 싶어서 꽤 많은 공을 들인 것 같던데. 단순히 내 쓰리 사이즈를 알고 싶었던 건 아닐 테고.”
조도현은 물티슈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우아하게 닦으면서 자연스럽게 물었다.
“...”
조도현도 상당히 독설가였다.
윤지현은 입술을 짓씹다가 잠깐 고민한 뒤 말했다.
“처음 뵙는다는 말은 실수였어요. 지난번에 진성주 씨께 쓰리 사이즈를 여쭸던 건... 제가 조 대표님 정장을 더럽혀서 새로 사드리기 위해서였어요. 그리고 조 대표님을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대표님께서 비서를 구하고 있다는 말을 들어서예요.”
윤지현은 마지막 한 마디를 강조했다. 그녀의 목적은 뚜렷했다.
조도현은 티슈를 내려놓은 뒤 단호히 말했다.
“윤지현 씨는 비서직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말을 마친 뒤 그는 뒤쪽 숲속으로 걸어갔다.
뭔가를 묻기도 전에 거절부터 당한 윤지현은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워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갔다.
그들이 나란히 숲속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는 심은우가 고객과 함께 골프카트를 타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구서희도 있었다.
심은우는 그녀의 섹시한 뒷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