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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수혈을 마친 차윤서는 현기증이 나서 벽을 짚고 겨우 나왔는데 박도하가 이제 막 수술실에서 나온 송이나 옆에 서서 손을 꼭 잡고 한없이 다정한 표정으로 뭐라 말하고 있었다. 와이프의 상태가 어떤지, 어디 불편한 데는 없는지 관심조차 없었고 그녀 홀로 집에 돌아가는 것마저 발견하지 못했다. 별장에 돌아온 차윤서는 먼저 주방에 들어갔다. 원래 빈혈기가 있던 그녀는 오늘 대량 수혈까지 마치자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대추차를 끓여 마셔서 원기를 회복하려 했더니 그릇에 담기도 바쁘게 기운이 없어서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짤그락하는 소리와 함께 그릇이 산산조각이 났고 수년간 당해왔던 굴욕과 야유가 북받쳐서 눈시울이 빨개졌다. “하준이가 옆에 없으니 난 역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네...” 쏟아진 대추차가 발끝에 닿자 지난 추억이 뇌리를 스쳤다. 그땐 사랑하는 애인이 든든하게 옆을 지켜주었다. 매번 생리통에 시달릴 때 우하준은 자상하게 대추 생강차를 끓여서 적당히 식힌 후 그녀에게 친히 먹여주기까지 했다. 가끔 애교를 부릴 때면 품에 꼭 안고 따뜻한 손길로 배를 쓰다듬으며 곧 괜찮아질 거라고 다독여주는 남자였다. 만사가 귀찮고 짜증 날 땐 묵묵히 옆에 앉아서 그녀의 투정을 다 받아주고 말미엔 나를 때리느라 손 아프지 않았냐며 호호 불어주던 남자... 차윤서는 유리 조각을 쓸어 담다가 끝내 손이 찔려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픈 건지 또 다른 이유인지 눈물이 앞을 가렸다. “진작 알아채야 했는데. 넌 날 이토록 사랑하지만 박도하는 단 한 번도 날 위해 가슴 설렌 적 없었잖아.” 산산조각이 난 그릇을 주워서 휴지통에 버린 후 차윤서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래도 괜찮아. 우리 곧 만날 테니까.” 자리에 앉아 책상을 바라보니 다 작성한 이혼합의서가 놓여 있었다. “두 분 사인하시고 가정법원에 제출하면 곧 이혼하게 됩니다.” 변호사의 말을 들은 차윤서는 오늘 외박까지 해버린 박도하가 떠올랐다. “제가 남편 대신 사인할 수 있나요?” “절대 안 되죠!” 변호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단호한 태도에 차윤서가 말을 이었다. “남편도 이혼에 동의해요. 바쁘다 보니 함께 못 왔을 뿐이에요. 정 못 믿겠으면 제가 직접 전화해볼게요.”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서 박도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 통화 연결음 끝에 이 남자가 드디어 전화를 받았다. “상의할 거 있는데...” 한편 박도하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덥석 잘랐다. “나 시간 없으니까 너 혼자 알아서 하면 돼. 더 상의할 거 없어.” 곧이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영락없이 송이나의 애교 조의 목소리였다. “도하야, 이 약 너무 써. 꼭 먹어야 해?” 전화를 끊기 전, 박도하의 한없이 자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연하지. 얼른 먹어야 나을 거 아니야.“ 차윤서는 변호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박도하의 태도에 변호사도 끝내 대체 사인을 수긍했다. 이에 차윤서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 이혼합의서에 박도하 대신 사인을 마쳤다. 로펌을 나선 그녀는 한 달 뒤 해성으로 가는 항공권을 끊었다. 일주일 후, 박도하가 드디어 집에 돌아왔다. 쌀쌀한 한기를 그대로 안고 집에 들어섰을 때 어느덧 새벽 시간대라 차윤서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박도하가 자연스럽게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더니 마침내 눈을 뜨고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처음 거절당한 박도하는 미간을 확 구겼다. “매일 밤 내 심장 소리를 들어야 잠들었잖아? 오늘은 왜? 아니야?” 결혼 생활 3년 동안 차윤서는 남편에게 무언가를 요구한 적이 극히 드물다. 그럼에도 박도하가 받아들인 제안은 단 하나, 바로 그녀를 꼭 끌어안고 자는 것이다. 금방 결혼했을 때 혼인신고서 말곤 이 여자에게 딱히 뭘 해준 게 없다. 다만 차윤서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그저 이 남자의 품에 안겨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잘 수만 있다면 충분히 만족하니까. 대체 왜 꼭 이 자세로 자야만 하냐고 수없이 물었지만 그때마다 차윤서는 달빛에 드리운 은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대답했다. “네 심장 소리가 좋아. 매일 이렇게 네 심장 소리만 들으면서 잘 수 있을까?” 한없이 그윽한 눈길로 이런 제안을 하니 박도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결국 지금까지 둘은 줄곧 이 자세로 잠들었다. 차윤서는 매일 밤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심장 소리를 들었는데 오늘 밤 단호하게 밀쳤다. “이제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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