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박현우와 성도섭은 동시에 이다빈을 쳐다봤다.
“네가 알아?”
박현우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네.”
이다빈은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오늘 아침 연구소의 노교수가 특별히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내어 날짜가 정해졌다고 알렸다.
바로 이번 달 28일이다. 이날이 문제가 없는지 그녀에게 물어봤었다. 적합하지 않으면 바꾸겠다고 했다.
“어? 어떻게 알았어?”
박현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눈빛은 흐릿했다.
“그게…”
이다빈은 눈살을 찌푸렸다.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어요. 하지만 날짜는 확실히 28일이에요.”
성도섭은 박현우를 한쪽으로 끌어당기더니 단둘이 들을 수 있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저 여자 때문에 못 살겠어. 진짜로! 그나마 얼굴이 반반하니까 참는 거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진작 열 번은 넘게 토했을 거야. 허풍 떠는 사람을 많이 보긴 했지만 이 정도인 사람은 처음이라고!”
박현우는 턱을 만지며 이다빈을 찬찬히 살폈다.
그는 무슨 일이든 잘 파악했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도 능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얼굴과 말투에서 거짓말이라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잠깐만, 현우야. 아버지에게서 들었는데 지금 서주 전체가, 아니, 대현 전체가 떠들썩하대. 재벌가들이 이 교수의 연구소와 협력하려고 한대. 새로운 나노신소재의 독점권을 따내고 싶어서 그러나 봐. 박씨 가문은 이 일에 참여할 생각이 없어? 나노신소재가 일단 회사의 생산 및 연구 개발에 적용되면 분명 큰돈을 벌 수 있을 거야! 앞으로 좋은 점도 아주 많을 것이고!”
성도섭은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감격하라 했다.
“참가는 하겠지만 이 일은 장기적으로 생각해야 해. 우리 박씨 가문이 서주의 갑부이긴 하지만 이번 나노신소재의 출시는 대현 전체의 거물들이 쟁취하기 위해 나설 거야. 우리 박씨 가문이 꼭 차지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어.”
박현우가 말을 마치자마자 이다빈이 그를 쳐다보았다.
“나노신소재와 협력하고 싶어요?”
이다빈의 물음에 박현우는 다시 그녀를 쳐다봤다.
2초 정도 침묵한 뒤 한마디 물었다.
“왜, 방법이라도 있어?”
이다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가 저를 구해줬던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만약 그쪽이 진정으로 협력하고 싶어 한다면 내가 약속해 줄 수 있어요.”
“에이!”
성도섭은 더 이상 신사다운 면모를 유지하지 못하고 그만 욕설을 내뱉었다.
“이다빈 씨, 박 도련님을 대신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지. 하지만 우리 박씨 가문 도련님도 충분히 능력이 있으니 굳이 번거롭게 하지 않아도 돼.”
“번거롭지 않아요. 그저 한 마디 전하는 것뿐이니까.”
이다빈은 담담하게 말했다.
성도섭은 더 이상 앉아있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목소리는 몇 배나 더 커졌다.
“아직도 안 끝났어? 그나마 여자라서 참고 있으니까 적당히 해! 안 그러면…”
“그만해.”
박현우도 일어섰다.
“하, 하지만 쟤 정말...”
“나와 저 여자는 순전히 할아버지의 강요로 약혼하는 거야. 한 달만 지나면 각자 알아서 갈 길 갈 것이고. 화를 내봤자 무슨 의미가 있어?”
박현우의 이런 말에도 성도섭은 견딜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을 이다빈도 느꼈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친부모조차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이 말해봤자 소용없다.
“약속은 꼭 지킬 거예요. 반드시 그렇게 될 거고요. 할아버지의 체면도 있으니까요. 28일 발표회 당일 연구소에서 직접 박선 재단과의 협력을 발표할 거예요.”
말을 마친 이다빈은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떴다.
“정말 더 이상 못 참겠어. 현우야, 네가 너무 안타까워. 약혼 기간이 한 달이라고 해도 네가 불쌍해. 어떻게 허풍을 떠는 여자를 약혼 상대로 맞이할 수 있어? 장담하는데 아마 너의 인생의 가장 큰 오점이 될 거야.”
대문으로 나가는 이다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성도섭은 그녀가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박현우는 이다빈에게서 시선을 돌린 지 오래다.
“이 얘기 이제 그만해, 이 고수 측 사람들과 약속 잡았어?”
성도섭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숨을 돌렸다.
“시간은 정했어. 나노신소재 발표회가 끝나면 적절한 시기에 만나 한판 대결을 보기로 했어.”
“왜 발표회가 끝난 다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박현우가 궁금해하자 성도섭이 잠깐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혹시 이 고수도 나노신소재의 발표회에 참석해야 하는 거 아닐까? 아니면 나노신소재의 라이선스를 놓고 같이 경쟁하려는 것일까?”
박현우는 이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발표회에서 미리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며칠 후.
“대박! 큰일 났어. 현우야, 큰일났어!”
성도섭은 부랴부랴 박현우의 사무실로 뛰어 들어갔다.
박현우는 하던 일을 멈추고 성도섭을 쳐다봤다.
“발표회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너도 알고 있었어?”
성도섭은 침을 꿀꺽 삼켰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말했다.
“정말 충격이야! 진짜로 28일이라니! 28일!”
아침 식사를 하던 중, 성도섭은 나노신소재 발표회의 날짜가 정해졌다는 부모님의 대화를 들었다.
그런데 마침 28일이었다.
“이다빈의... 말이 맞았어!”
깍지를 낀 채 책상에 기대앉은 박현우는 머릿속에 엊그제 이다빈이 별장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시 그는 직감적으로 그녀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진짜로 28일일 줄은 몰랐다.
“어떻게 알았을까? 그것도 우리보다 더 일찍?”
성도섭은 아무리 생각해도 오리무중이었다.
“할아버지가 미리 소식을 알고 이다빈에게 알려줬겠지.”
박현우는 이렇게 추측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
성도섭은 무엇인가 깨달은 듯 탁자를 치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다빈, 이 쓸모없는 인간이 무슨 재주가 있어 정확히 알았겠어. 분명 할아버지가 알려 주셨을 거야. 할아버지는 네가 이다빈을 하루빨리 받아들이길 바라는 마음에 넓은 인맥을 통해 발표회 날짜를 아셨겠지. 그리고 일부러 이다빈에게 미리 알려서 너에게 호감을 사게 한 것이지!”
박현우도 그렇게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너더러 28일 발표회에 이다빈을 데려가라고 하지는 않으셨어? 진심으로 조언하는데 만약 할아버지가 진짜 그렇게 말한다면 절대 안 된다고 해야 해. 알았지? 이다빈처럼 허풍 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혹시라도 거물급이 참석하는 발표회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이라도 하면 너만 큰 망신을 당하게 될 거니까!”
성도섭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아직 그런 말씀은 안 하셨어.”
“그래, 다행이네...”
성도섭은 손에 땀을 쥐며 말했다.
“만약 할아버지가 꼭 데려가라고 하면 중간에 버릴 방법을 생각해 봐.”
“에취”
이다빈은 하굣길에 재채기를 했다.
누가 그녀의 흉이라도 보고 있는 것일까?
이다빈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빨간 장미꽃을 가득 실은 초호화 스포츠카가 저 먼 곳에서 달려왔다.
차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 운전석에 있던 남자는 차에서 내린 후 장미 꽃다발을 그녀 앞에 내밀었다.
“이다빈, 같이 밥 먹으러 갈래?”
서범준은 말을 하면서도 손을 들어 이마의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이다빈은 서범준의 손에 들린 장미꽃을 힐끗 보더니 담담히 말했다.
“혹시 나에게 대시하는 거야?”
“똑똑하네? 역시 난 똑똑한 여자가 제일 좋아.”
“너는 반장의 남자친구야. 그런데 진짜로 나에게 대시하려고?”
“오시연이 내 여자친구인 건 맞지만 너만 허락해준다면 바로 헤어질 수 있어.”
서범준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만만한 듯 말했다. 자신의 매력과 재력으로 이다빈을 분명 쟁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다빈은 눈살을 찌푸리며 냉랭하게 반응했다.
“네가 헤어지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인데? 너의 얼굴을 보면 밥이 안 넘어가. 돈 몇 푼 있다고 모든 여자들이 다 너의 주변을 맴돌 것 같아?”
서범준 같은 남자는 이다빈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마음에 들 리가 없다.
이생에 이다빈에게 제일 부족하지 않은 것이 돈이다.
순간 서범준의 머릿속에 그날 캠퍼스 입구에서 이다빈을 마중 나온 남자와 그 한정판 마이바흐가 떠올랐다.
“이다빈, 그날 캠퍼스 입구에 나타난 사람이 네가 체면치레하기 위해 고용한 사람인 걸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 차는… 너 참 대단해. 그 차도 다 빌려오고. 설마 몸 팔아서 유혹한 것은 아니지…?”
“악!”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범준은 돼지 잡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