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네, 알았어요.”
차수현은 얌전히 대답한 후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온씨 집안에서 나와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후 그녀는 비로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온은수는 감정 기복이 심하여 상대하기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엄마를 위해서라도 끝까지 버텨내야 했다.
……
차수현은 버스를 타고 병원에 갔다. 병실에 도착하자 단짝 친구 한가연이 한참 엄마를 보살펴주고 있었다. 한편 엄마의 안색이 전보다 훨씬 좋아진 걸 발견한 그녀는 걱정했던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온혜정은 딸을 보자 반가워 하며 그녀에게 새로운 직업이 어떤 일인지 물어보았다.
차수현은 미리 준비했던 대로 대답하며 엄마를 안심시키며 이야기 해주었다.
세 사람이 한참 얘기를 나눈 후 온혜정이 차수현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아 참, 은서는 잘 지낸대? 지금도 해외에 있어? 언제쯤 귀국한대? 걔가 돌아오면 우리 수현이도 이렇게 고생하진 않을 텐데 말이야.”
차수현은 미소를 짓고 있다가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낯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녀는 오랫동안 온은서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
대학교 때 차수현은 엄마를 보살피면서 학교에 다니느라 그 모습은 초라했었다.. 그녀가 가장 힘들 때 온은서가 그녀를 도와줬었다.
그렇게 은서는 착하고 해맑은 모습이 그녀의 마음을 서서히 열게하였다. 그 뒤로 병원에도 자주 찾아와 온혜정을 돌봐주며 그녀에게 사위로 인정받았다.
두 사람은 대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결혼하려 했지만 온은서가 해외 의학연구소로부터 파격적인 오퍼를 받았다. 그에게 첨단의학연구를 위해 출국해달라는 초대장이 왔었다.
온은서는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면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처음 두 사람은 자주 연락하며 지냈지만 갑자기 반년 전부터 연락이 뚝 끊겨였다.
차수현도 차츰차츰 눈치를 챘다. 온은서가 어쩌면 날 이제 짐 처럼 느껴져서싫증 났거나 해외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 그녀를 깨끗이 잊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침울한 마음을 뒤로한 채 애써 웃으며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도 알다시피 은서 해외에서 공부하느라 바빠요. 돌아올 때가 되면 알아서 돌아오겠죠.”
온혜정은 대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더 캐묻지 않고 몇 마디 당부만 했다. 그녀는 또다시 피곤함이 몰려와 차수현의 시중을 받으며 잠이 들었다.
온혜정이 잠이 들자 한가연은 재빨리 차수현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머릿속에 의문투성이가 한 가득했다.
두 사람은 병원 옥상으로 올라가 조용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한가연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수현아, 너 아까 수상해 보이던데 솔직하게 말해봐. 은서랑 무슨 일 있는 거지? 너 오랫동안 은서 얘기 안 한 거 알아?”
차수현은 씁쓸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최근 일어났던 일들을 낱낱이 알려주었다.
며칠 동안 차수현은 숨 막히는 압박감과 긴장감 속에서 지내왔다. 그녀도 하소연 할 곳이 필요했고 마음속에 쌓인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풀고 싶었다.
한가연은 요즘 그녀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듣더니 속상한 눈빛으로 말했다.
“바보야, 이렇게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 왜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었어? 얼렁뚱땅 낯선 남자한테 시집가면 어떡해!”
차수현은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한가연은 평범한 가정형편 이였고 마약중독자인 아빠까지 있어서 차수현의 어마어마한 치료비를 부담해줄 능력이 못 됐다.
“가연아, 걱정하지 마. 그 사람한테 시집간 거 그다지 나쁠 것도 없어. 날 잡아먹지 않아.”
한가연은 아직도 강한 척하는 차수현을 보며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다만 그녀는 차수현의 성격을 잘 알기에 더 말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 꼭 안아주었다.
차수현은 간만에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숨이 탁 트일 것 같았다. 그녀는 어느 샌가 눈물이 두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뜻밖의 사고를 당하던 그 날 밤, 차수현은 온은서가 돌아오길 수없이 상상했다. 마치 동화 속 왕자님처럼 그녀를 구해주길 바랬는데 모든 게 허황된 꿈일 뿐이었다. 그녀의 삶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어쩌면 온은서가 해외에 있어 그녀의 초라한 모습을 차라리 보지 못한 게 다행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돈 때문에 낯선 남자에게 시집간 것도 전혀 모를 테니 천만다행이었다.
최소한 그의 마음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될 테니, 차수현은 이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 묵묵히 울고 난 후에야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걱정 마, 가연아. 나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 할 필요 없어.”
비록 현실은 어쩔 수 없지만 삶은 계속되어야 하니 슬픔에만 빠져있을 순 없었다. 차수현은 한바탕 울고 난 뒤 용감하게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기로 했다.
……
온씨 일가 저택.
온은수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 곧바로 윤찬을 불러와 그날 사고를 낸 기사와 배후 뒤에 누가 있는지를 조사하라고 했다.
윤찬은 그의 지시하는 모든 내용을모조리 적었다. 온은수는 손에 쥔 서류를 훑어보더니 또 뭔가 생각난 듯 말을 이어갔다.
“그날 호텔에서 만난 그 여자를 조사하라던 건 어떻게 됐어? 뭐 새로운 거 나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