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한마디 말에 모든 사람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이변섭, 너 이 불효자식!”
이 영감이 분노에 몸을 부르르 떨며 호통을 쳤다.
“그 여자의 아버지가 네 아버지를 죽였는데도 너, 넌...”
“영감님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화 푸세요. 제가 이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영감님한테 말씀드린 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영감님과 의논하기 위해서였어요.”
장하늘이 얼른 어르신을 부축하며 입을 열었다.
“이혼! 당장 이혼해!”
“변섭아, 내가 너를 나무라는 게 아니라.”
장하늘이 가식적인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결혼처럼 큰일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은 건 둘째 치고 어떻게 원수의 딸을 집으로 들일 수가 있니?!”
하루아침에 무려 삼 년의 생활비가 깎여버린 장하늘이 이를 결코 달갑게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이변섭을 말릴 수 없다면 강수지에게 마수를 뻗칠 수밖에, 그녀는 탐정에게 강수지의 뒷조사를 맡겼었다.
그런데 이 조사를 통해 뜻밖에도 강수지의 신분 비밀이 밝혀진 것이다!
장하늘은 영감님이 이변섭에서 압력을 가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저 없이 이를 영감님에게 고자질했다.
그녀는 더욱 영감님의 화를 돋우려 입을 놀리려다가 이변섭의 매서운 눈초리에 입을 삐죽거리며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맞습니다. 강 선생님의 딸이에요.”
이변섭이 대답했다.
“하지만 윗세대가 저지른 잘못을 다음 세대에게 덮어씌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강수지는 깜짝 놀란 눈빛으로 이변섭을 바라보았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고 있는다는 눈빛이었다. 분명히 그녀에게 화풀이하는 것이면서 그럴싸한 말로 포장하는 것만 같았다.
이 영감은 분노에 가득 차 지팡이를 땅바닥에 세게 내리치며 언성을 높였다.
“어리석은 소리! 변섭아, 넌 이미 약혼할 상대가 있다는 걸 잊지 마라. 게다가 그건 네 아버지가 직접 나선 일이다!”
“전 제 마음에 드는 사람과 결혼할 겁니다.”
“너...”
이 영감은 숨이 턱 막히는 느낌에 심장을 부여잡았다.
강수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변섭의 곁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는 병풍과 다름없었다. 이변섭이 그녀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 이상 그녀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사실 그녀도 이변섭이 왜 그녀와 결혼한 것인지 아리송했다.
“왜 소정운 씨랑 결혼하지 않으세요?”
속으로만 생각하다가 저도 모르게 말이 새어 나왔다.
말을 내뱉자마자 그녀는 곧 막심한 후회가 몰려왔다.
이건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잖아!
“귀먹었어? 말했잖아. 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할 거라고.”
“아... 저...를 좋아하세요?”
이렇게 이해해도 되는 건가?
2년 동안 못살게 굴더니 마음이라도 생긴 걸까?
“강수지, 허튼 생각하지 마!”
이변섭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이 저를 사랑하게 될까 두렵네요.”
강수지는 고개를 숙이고 애꿎은 손가락을 배배 꼬았다.
“두 사람이 오랫동안 함께 지내다 보면 때론 저도 모르는 사이에...”
“허.”
이변섭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너를 다치기라도 할 것 같아? 꿈 깨!”
온 세상의 여자가 다 죽어 없어진다고 해도, 그녀가 발가벗고 그의 앞에 서있는다 해도 그는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강수지는 더욱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언뜻 보기엔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지만 사실... 그녀의 눈동자는 교활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사실 그건 강수지의 계산된 물음이었다. 앞으로의 시간 동안 이변섭이 그녀를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쐐기를 박기 위해서였다.
그럼, 그녀는 안전해질 테니까.
이변섭과 강경하게 맞서는 건 스스로 자신을 사지로 내모는 것이었기에 지략으로 승부수를 띄우는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
이변섭은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 일은 신경 쓰지 마시고 할아버지 건강을 챙기세요. 이씨 가문도, 이 씨 그룹도 모두 제 손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를 테니까요.”
“죽어도 이혼하지 않겠다는 말이지?”
“이혼하든 하지 않든 제가 결정합니다.”
“여우 같은 년!”
이변섭의 단호한 태도에 이 영감은 화를 전부 강수지에게 쏟아부었다.
“내 아들을 해친 거로도 모자라서 이젠 내 손자까지 너한테 홀려버렸어... 우리 이씨 가문이 도대체 전생에 너에게 대체 무슨 빚을 졌기에...!!”
장하늘은 일부러 더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
“영감님, 고정하시고 말로 하세요. 말로.”
“이런 여우 같은 년은 때려죽여야 해!”
이 영감은 지팡이를 번쩍 치켜들더니 강수지 쪽으로 냅다 던져버렸다.
여기에 한 번이라도 맞게 되면 틀림없이 며칠 동안 퍼렇게 멍이 들게 뻔했다.
눈알을 팽글팽글 돌리던 강수지는 문득 뾰족한 수가 떠올랐다.
그녀는 별안간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이변섭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꺅! 여보, 구해줘요!”
이변섭: “...”
어쭈? 연기할 줄도 알고?
“여보, 저 너무 무서워요.”
그녀는 볼을 그의 등에 찰싹 붙이며 말을 이었다.
“제가 다치게 되면 당신 맘 아플 거잖아요.”
“이거 봐, 이거 봐. 평소에도 이렇게 변섭이를 홀린 게야!”
이 영감은 지팡이를 휘저으며 더욱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강수지는 있는 힘껏 이변섭을 그녀의 앞에 내세웠고 영감님은 몇 번이나 시도해 보았지만 결국 그녀를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나중에 이 영감은 아예 지팡이로 이변섭의 등을 쿵 하고 내리쳤다.
“미색이나 탐하는 쓸모없는 놈!”
이변섭이 매를 맞는 건 그녀의 예상 밖에 일이었다.
그녀는 그만 얼굴이 창백해졌다. 일이 커진 것 같은데...
이를 어쩌지, 끝장난 거 아니야?
이변섭은 서늘한 눈빛으로 강수지를 쏘아보았다.
“강수지, 죽고 싶어?!”
“전...”
그때 전화벨 소리가 갑자기 울려댔다.
이변섭은 발신자를 힐끗 바라보았다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대표님, 어젯밤에 대표님의 방에 침입했던 여자를 찾았습니다!”
”어디서?”
”강남 정신병원에서요!”
아니 어떻게... 강수지가 이 년 머물렀던 곳인 거지?
이변섭은 전화를 꽉 쥐고서 고개를 돌려 강수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너무 날카로운 나머지 강수지는 머리를 옆으로 돌려 따가운 그의 시선을 피했다.
더 많은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기에 이변섭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면서 강수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가자!”
등 뒤에선 이 영감의 욕설 어린 고함이 뒤섞여 들려오고 있었다.
이변섭이 차에 훌쩍 올라타고 강수지도 막 차에 오르려 할 때 그는 이미 페달을 밟아버렸고 차는 굉음을 내며 순식간에 멀어져 버렸다.
그래... 무슨 자격으로 그의 차에 올라타겠어. 또 걸어야겠네. 역시 뭐니 뭐니 해도 11번 버스가 최고였다.
이씨 가문의 본가는 교외와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길에 지나다니는 차도 별로 없었다. 게다가 시간이 으슥한 밤이어서 강수지는 손에서 식은땀이 절로 났다.
하지만, 그녀는 곧 “사업 기회”를 발견했다.
바로 폐품을 줍는 것이다.
여기는 고급 별장 구역이었고 쓰레기통에는 빈 페트병, 택배 박스가 가득했다. 이걸 모아서 폐품 회수 가게로 가져가면 적어도 몇만 원은 받고 팔 수 있었다!
강수지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본격적인 작업에 나섰다.
그렇게 쓰레기를 주우며 걷던 그녀는 제경채에 거의 도착하기 전 근처의 폐품 회수 가게를 찾아 7만 원의 수입을 올렸다.
기분 좋게 집에 돌아온 그녀는 이변섭이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이상하다... 어디로 간 거지?
...
고요한 밤을 가르며 요란하게 달리던 스포츠카는 어느 한 정신병원에 멈춰 섰다.
“대표님!”
이변섭은 긴 다리를 내디디며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은?”
“원장실에 있습니다.”
그는 발로 쾅 문을 걷어찬 뒤 눈빛을 번득이며 내부를 살펴보았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쉰 살가량의 뚱뚱한 남자는 두들겨 맞은 건지 얼굴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원장이 황송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그 옆에는 한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화려한 메이크업으로 치장된 얼굴과 옷차림에서 저속한 인플루언서 느낌이 물씬 풍겼다.
“... 저 사람이야?”
이변섭은 다소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천천히 물었다.
“확실해?”
그날 밤의 여인은 호리호리한 몸매에 화장기 없는 청초한 얼굴이었다. 게다가 처음이었고.
하지만 눈앞의 이 여자는 그의 예상과 아주 달랐다.
착오가 생긴 게 아닐까?
이 여자보다는 강수지의 분위기가 더 그 여인에게 어울렸다.
“확실합니다. 대표님. 원장님의 딸, 유미나입니다.”
부하가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