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강수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친 거 아니야?!
하지만 이변섭은 태연하게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옷을 벗기며 그녀의 살갗을 씻겨주었다.
곧 강수지의 몸은 군데군데 붉게 부어올랐다.
“이변섭 씨!”
강수지는 더 이상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그를 향해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왜 박태오가 만지도록 가만있는 겁니까? 어깨도 안돼요!”
이변섭의 소유욕은 무서울 정도로 강했다.
그녀는 엄연히 그의 것이다. 그가 아무리 그녀를 못살게 굴고 괴롭힌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그녀를 다치는 꼴은 용납이 안되었다.
“밀어냈다고요! 겨우 1초뿐이었어요!”
강수지가 붉은 눈시울로 호소했다.
“몇 초가 됐든 안 돼요!”
이변섭은 모진 손길로 강수지의 어깨를 박박 씻었다. 박태오의 손길이 닿은 그녀의 피부를 한 층 벗겨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강수지는 처음에는 격렬하게 반항하다가 나중엔 꼭두각시처럼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어느새 온몸이 흠뻑 젖어버렸고 그녀의 머리카락 끝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변섭의 몸도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강수지의 창백한 얼굴을 보면서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오직 이 순간 그녀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빌어먹을!”
이윽고 이변섭은 샤워기를 내동댕이치더니 그녀의 턱을 잡아올리며 고개를 숙인 채 거칠게 입을 맞추었다.
키스라기보다 물어뜯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모두 흠뻑 젖었고 강수지는 억지로 고개를 한껏 젖혀야 했다.
어차피 저항할 수도 없었다.
그녀의 보기 드문 순종은 이변섭의 뜨거운 몸을 더욱 활활 타오르게 만들었다.
이러다 그는 곧 자신을 억제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녀의 몸을 보고 있노라면 자꾸만 오래전에 느꼈던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갑자기 강수지가 떨리는 손으로 그의 목을 그러안으며 물었다.
“이변섭 씨... 돈 좀 빌려줄래요?”
정말 막다른 골목에 이르른 그녀였다. 아빠의 화상을 치료해 주는 것과 아빠가 감방에서 괴롭힘 없는 나날을 보내게 하기 위해 감방안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 이는 모두 돈이 필요했다.
“허. 왜 이번엔 가식적으로 날 밀어내지 않는다 했더니 원하는 게 있었네요.”
이변섭은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알다시피 나한테 넘쳐나는 게 바로 돈이라.”
“네. 그래서 저한테 빌려줄 수 있어요?”
강수지는 주먹을 불끈 쥐며 엉ㄱ지로 그와 눈을 맞추었다.
“얼마면 되죠?”
그는 그의 입가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물었다.
“4천만 원이면 돼요.”
강수지는 감히 욕심을 부리지도 못했다. 2천만 원은 치료에, 나머지 2천만 원은 돈 봉투로 그들의 주머니에 넣어주고, 아마 이거면 충분할 것이다.
먼저 급한 불부터 끄고 나중에 다시 방법을 강구할 생각이었다.
이 숫자는 이변섭에게 있어 소털 하나 뽑은 것처럼 매우 하찮은 숫자였다.
하지만...
“무슨 근거로 나한테서 4천만 원을 빌리는 거죠?”
강수지는 이를 악물며 잇새 사이로 힘겹게 대답을 토해냈다.
“저는 당신 와이프니까요.”
이에 그는 미간을 팍 찌푸리며 그녀를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뿌리쳤다.
“강수지 씨, 주제를 알아요!”
갑자기 완전히 흥미를 잃어버린 이변섭은 뒤돌아 밖으로 나가려 했다.
강수지는 등을 욕실 타일에 붙이며 그의 뒷모습을 향해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변섭 씨, 당신이 저한테 주지 않으면... 전 박태오 씨를 찾아갈 거예요!”
그녀는 일부러 이렇게 그를 협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는 이변섭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강수지는 그가 어떤 포인트에서 화가 나고 어떻게 달래면 그가 화를 푸는지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 그의 성질을 확실히 알아야만 그의 손안에서 살아갈 수 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이변섭이 몸을 돌리며 언성을 높였다.
“감히!”
“궁지에 몰린 사람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거든요!”
강수지가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대답했다.
“4천만 원으로 뭐 하려는 거죠?”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저...”
강수지는 이를 꽉 악물었다.
“나름대로 쓸 데가 있어요.”
그녀가 이 돈을 아빠의 상처를 치료하는데 쓴다는 걸 이변섭이 알게 되면 더욱 돈을 빌려주지 않으려 할까 봐 무서웠다.
결국엔 그가 유미나에게 시킨 일이니까.
“제 월급을 미리 지불했다고 치면 되잖아요.”
“나중에 매일 주얼리 디자인을 그려서 빚을 갚을게요!”
강수지가 말을 이었다.
그녀는 전에 강남 대학 디자인과의 엘리트였다.
수많은 브랜드가 그녀를 스카우트하고 싶어 했고 그녀의 디자인은 아직까지도 후배의 템플릿이었다.
“좋아요.”
이변섭이 한쪽 입가를 올리며 대답했다.
그는 상인으로서 여태껏 밑지는 장사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제안을 수락하자 강수지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변섭은 그 자리에서 그녀의 계좌에 4천만 원을 입금해 주었다.
“약속 지켜요!”
그녀는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아빠가 드디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강수지는 이변섭이 그녀를 어떤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든 상관하지 않고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밖으로 나갔다.
이변섭은 창가에 서서 줄담배를 연거푸 피웠다.
애초에 그가 강수지와 결혼했던 이유는 장하늘과 소정운이 또 무슨 꿍꿍이를 궁리해 내는 걸 막기 위해 아직 찾지 못한 유미나를 대신할 대체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사모님의 자리는 그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줘야 했다.
그날 밤, 유미나는 확실히 그의 심장을 설렘으로 두근거리고 만들었다.
게다가 유미나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그의 병을 치료해 주었다.
이변섭은 은혜와 원한의 구분이 명확한 사람이었다.
그는 담배꽁초를 짓이기며 잘 준비를 했다. 이미 새벽이 다 된 시각이었다.
이변섭이 막 침대에 몸을 뉘려 할 때 밖에서 간간이 기침 소리가 들렸다.
3~5분 간격씩 알람보다 더 정확하게 울리는, 콧물을 풀쩍이는 소리를 동반한 기침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원래 수면이 얕았던 그는 아주 조용한 환경 속에서만 잠에 들 수 있었다. 강수지가 이렇게 기침을 계속한다면 잠은커녕 오히려 피곤이 더 쌓일 게 뻔했다.
이변섭은 결국 침대에서 내려오며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벌컥 문을 열었다.
“강수지 씨.”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강수지 씨!”
그는 목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소리 높여 그녀를 불렀다.
“네...”
그녀는 힘없이 한 마디 대꾸하며 눈을 뜨려고 애썼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변섭은 그제야 그녀의 얼굴이 열로 화끈거리고 입술이 하얗게 질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손을 뻗어 만져보니 그녀의 열기에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열이 난 것이다.
이 여자의 몸은... 대체 왜 이렇게 허약한 것인지.
“일어나요.”
이변섭이 냉담한 얼굴로 말했다.
“내 방 문 앞에서 죽지 말고.”
그녀는 몸을 뒤척이며 마치 새끼 고양이처럼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겼다.
“머리가 어지럽고 힘들어요...”
말하면서 그녀는 또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안아줘요.”
강수지가 중얼거렸다.
“약 안 먹을래요. 써서 먹기 싫어요.”
열에 정신이 혼미해진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그녀의 어린 시절 기억들로 가득했다. 매번 감기에 걸릴 때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안고 달래면서 한 모금씩 약을 먹이군 했다.
이변섭은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몇 초가 지났을까. 그는 허리를 굽혀 그녀를 번쩍 안고는 침실로 들어갔다.
그는 거친 손길로 그녀에게 해열 패치를 붙여준 뒤 그녀를 소파에 툭 내팽개쳤다.
강수지의 입으로 계속 중얼거리며 잠꼬대를 했다. 잘 알아들을 수 없었던 이변섭은 그만 짜증이 솟구쳤다._x000B_”조용히 좀 해요!”
이변섭의 호통에 그녀는 어깨를 바르르 떨다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이변섭은 몸을 돌려 침대로 돌아갔다.
그때 뒤에서 “쿵”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강수지가 소파에서 바닥에 굴러떨어져 있었다.
“바보 같기는!”
이튿날.
강수지는 몸을 뒤척이며 습관적으로 머리를 베개에 비비적거렸다. 그런데 이 베개가...
왜 딱딱한 것 같지?
그녀가 잠결에 손으로 베개를 만져보자 딱딱한 건 둘째치고 굉장히 탄력적이었다.
가만, 이건 그녀의 베개가 아닌 것 같은데 뭐지?
어슴푸레하게 눈을 떠서 보려고 할 때 머리 위에서 이변섭의 목소리가 울렸다.
“다 만졌습니까?”
어머, 이거 꿈이지?
번쩍 고개를 들자 조각처럼 잘생긴 이목구비가 바로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꺅!”
강수지는 깜짝 놀라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다가 자칫하면 침대에서 놀라 굴러떨어질 뻔했다.
이변섭은 무심하게 손으로 그녀를 다시 품에 끌어안았다.
“바보 같긴, 또 떨어지려고 그래요?”
“제, 제가 왜 당신의 침대에서 잔 거예요?”
강수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몽유병이 있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