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숨을 헉하고 들이켠 강수지는 곧바로 몸을 바로 했다.
“아니요. 바로 갈게요!”
막 두 걸음을 내딛자 이번에는 박태오의 놀란 표정과 시선이 마주쳤다.
강수지도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박태오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이게 바로 제가 말한 쥐입니다.”
이변섭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우스운 꼴을 보였군요.”
강수지는 예의 차린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방해했군요, 두 분 계속하세요.”
그녀는 곁눈질 한 번 하지 않은 채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박태오의 곁을 지나갔다.
박태오는 할 말이 많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때, 이변섭이 그녀를 불렀다.
“잠깐.”
“대표님?”
“강슂.”
이변섭이 물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너 대학 주얼리 디자인 전공 나왔지?”
주얼리 디자인…
당시까지만 해도 강수지는 강씨 가문의 보물로 예쁨 받고 지내 자유롭게 자신의 사랑과 꿈만 좇으면 되었기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전공을 선택했었다.
대학 재학 시기 디자인했던 도안은 번번이 상을 받았고 업계 내에 호평이 줄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는 그저 한 알의 모래알이 되어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모든 기력을 다 소진하고 있었다.
“네.”
강수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졸업은 못했어요.”
학업 졸업까지 1년이 남았지만 갑자기 나타난 이변섭은 곧바로 그녀를 끌고 가 정신병원에 가둬버렸다.
그 뒤로, 인생이 급변했다.
그녀가 말을 마친 순간 사무실 문이 열렸다.
분위기가 뛰어나고 여우 같은 눈에 입꼬리에는 날티나는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가 들어왔다.
최지호였다.
그는 이씨 그룹의 부대표이자, 이변섭의 친한 친구로 능력도 몹시 뛰어났다.
최지호는 눈썹을 까딱이며 말했다.
“변섭아, 새로 설립하는 주얼리 브랜드를 나한테 맡기려고 날 유럽 지사에서 부른 거야?”
“응. 그리고 미디어 쪽도 네가 담당해.”
최지호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연예계에 진입하려고?”
“안돼?”
이변섭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니면 능력이 안 돼서 두 부문을 동시에 관리하지 못하겠어?”
“날 과로사 시킬셈이야? 공장 기계도 이런 식으로는 안 돌려!”
“월급 더 줄게.”
“나 그깟 푼돈 필요 없어.”
최지호가 두 손을 펼쳐 보였다.
“주얼리 브랜드는 이해하겠는데, 연예계는 물이 얼마나 더러운데… 왜 그걸 건드릴 생각을 한 거야?”
이변섭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여자 때문에.”
“아! 이번에 결혼한 그 와이프 때문이구나!”
옆에 있던 강수지는 할 말을 잃었다.
“….”
최지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변섭아, 너 몸이 버텨나겠어? 집에도 있고 바깥에도 여럿이나 있고!”
이변섭은 사정없이 그에게 발길질을 했다.
“물건은?”
“여기.”
최지호가 디자인 원고를 꺼내자 이변섭은 곧장 강수지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판띠런의 주얼리 디자인이야. 보고 문제점을 찾아내.”
“그게…”
“얘기해.”
이변섭은 턱을 치켜들었다.
“난 사실이 듣고 싶어.”
박태오도 그녀를 쳐다봤다.
“좋아요.”
강수지는 디자인 원고를 가리키며 말했다.
“근 3년간 ‘판띠런’의 전체적인 디자인 수준은 심각하게 하락하고 있어요. 계속해서 소비자들에게 환영받고 있는 건 그저 브랜드 효과의 영향 덕일 뿐이죠.”
“우선, 명확한 위치가 없어요. ‘판띠런’은 도대체 사치품 시장을 노리고 싶은 건가요, 아니면 일반 소비자층을 노리고 싶은 건가요?”
“그다음으로, 디자인이 너무 구식이에요. 새로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죠. 젊은 디자인 인재를 더 모집하는 게 좋을 거예요.”
강수지는 쉬지 않고 자신만만하고 유창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변섭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쳐다봤다.
지금의 그녀는 유난히 매력적이었다. 더는 우물쭈물하며 비굴하지 않았고 두 눈에는 빛이 존재했다.
“제가 지금 생각나는 건 이 정도예요.”
강수지가 말했다.
“못난 모습을 보였군요.”
하지만 이변섭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단박에 ‘판띠런’의 현재 형세에 대해 짚어냈군.”
그가 전에 했던 생각과 일치했다.
강수지는… 또다시 그에게 놀라움을 안긴듯했다.
박태오는 안색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말을 이어갔다.
“비판이 있어야 발전을 하겠죠. 이 대표님, 협력에 관해선….”
“조금 더 고민해 보도록 하죠.”
“네.”
박태오는 떠나기 전 특별히 강수지를 한 번 더 쳐다봤다.
그 눈빛에는 너무나도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강수지는 고개를 숙여 그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최지호는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변섭아, 어디서 저런 고급 인재를 데려온 거야”
이변섭이 대답했다.
“저게 바로 네가 말한 나와 새로 결혼한 아내야.”
“사모님이셨군! 안녕하세요, 최지호입니다.”
최지호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사모님같이 능력 있는 여자만이 변섭이를 사로잡을 수 있군요!”
“안녕하세요, 최 이사님.”
“마침 잘됐네요. 변섭이의 주얼리 브랜드가 곧 런칭하는데 이제는 제가 관리하게 되었거든요. 마침 디자이너가 부족하던 참인데, 와서 일해보시겠어요?”
강수지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래도 돼요?”
“당연하죠.”
최지호가 말했다.
“사모님의 능력이라면 절대로 잘 해내실 거예요!”
비록 겉보기엔 건들건들해 보여도 사업에서는 절대로 함부로 구는 것 없이 전부 미리 계획을 하는 타입이었다.
최지호는 브랜드를 일떠 세우는 데에 아주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박경 그룹의 ‘판띠런’을 뛰어넘는 건 시간문제였다.
강수지는 이변섭을 쳐다봤다. 그의 대답이 떨어져야만 했다.
“빌려주는 거야.”
이변섭이 최지호를 흘깃 쳐다봤다.
“당분간만이야, 돌려줘야 해.”
최지호는 폭소를 터트렸다.
“이렇게까지 깨를 볶을 건 없잖아! 여전히 이씨 그룹에 있잖아, 일하는 층만 바뀌는 거라 보고 싶으면 엘리베이터만 타면 되잖아!”
이변섭이 다시 한번 발길질을 하자 그는 펄쩍 뛰며 피했다.
“갑시다, 사모님. 사모님의 디자인이 더없이 기대되는군요!”
“최 이사님, 편하게 이름 불러주세요.”
“오케이!”
최지호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금부터 수지 씨는 제 유능한 인재예요!”
이변섭은 눈을 가늘게 떴다.
“손.”
최지호는 곧바로 손을 뗐다.
기왕 강수지가 뛰어난 주얼리 디자이너면 이변섭은 그녀가 자신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수모를 당하는 것 말고도 그녀의 가치를 발휘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물건마다 제 가치가 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어차피 아무리 멀리 날아간다 해도 그의 손바닥 안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최지호가 떠나고, 이변섭은 소파에 앉아 담배 한 가치를 꺼내 손에서 가지고 놀았다.
“말해 봐, 박태오와 무슨 사이야?”
그는 직설적으로 말을 꺼냈다.
그 말에 강수지는 깜짝 놀랐다. 이변섭이… 눈치챈 건가?
분명 박태오와는 아무런 교류도 없었을 텐데!
“난 쓸데없는 말과 거짓말은 듣고 싶지 않아.”
이변섭이 강조했다.
“대답!”
그의 강압적인 분위기에 눌려 강수지는 사실대로 말했다.
“한때 제 약혼자였어요.”
이변섭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약혼자?”
“하지만 2년 전에 혼약은 해제됐어요. 그 사람은 출국했고 전… 정신병원에 갇혔고요. 오늘에서야 다시 만났어요.”
“내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결혼했겠네?”
강수지는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랬겠죠. 하지만 아쉽게도 인생에 무슨 만약이 그렇게 많겠어요.”
이변섭이 별안간 가까이 다가오더니 은근하게 불렀다.
“강수지.”
그 부름에 강수지는 신경이 곤두섰다.
“속으로는 분명 내가 아주 밉겠지.”
그의 뜨거운 숨결이 얼굴에 닿았다.
“내가 네 인생을 망쳐서 원망스럽겠지. 원망스럽다 못해 직접 날 죽이고 싶겠지. 내가 죽은 다음에는 내 시체라도 꺼내서 채찍질을 하고 싶겠지… 안 그래?”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변섭 씨, 우린 모두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그의 입꼬리에 머금고 있던 웃음이 점차 굳었다.
“내가, 불쌍해?”
“당신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었고, 전 행복했던 가정을 잃었죠. 우린, 사실 모두 운명에 놀아나고 있는 장기말에 불과해요.”
“이건 다 네 자업자득이야! 네 아버지가 이 모든 걸 망친 거라고!”
강수지는 반박할 수 없었다. 아무런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변섭의 숨결은 빠르게 멀어졌다. 담배에 불을 붙인 그는 차갑게 말했다.
“꺼져.”
강수지는 등을 돌려 나갔다.
흐릿한 담배 연기 속, 이변섭의 표정은 아주 심각했다. 디자인 원고를 흘깃 쳐다본 그는 소리 높여 불렀다.
“범지훈!”
“네, 대표님.”
“박태오에 대해 조사해. 오늘 밤에 결과 줘.”
“네!”
강수지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강수지 씨입니까?”
“네.”
“교도소 관계자입니다.”
상대방이 입을 열었다.
“부친께 사고가 생겼습니다. 지금 당장 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그녀는 황급히 계단으로 뛰어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시간 따위는 없었다.
엄마는 이미 이변섭의 손에 들어간 상황에서… 아버지까지 무슨 일이 생겨서는 안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