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온서우가 떠난 직후, 새아빠 유혁수가 딸이 도망간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병실의 텅 빈 침대를 바라보며 그는 씩씩거리며 침대 다리를 걷어찼다. 젠장, 역시 친딸이 아니면 아무리 잘 키워줘도 정이 안 생긴다더니, 10년간 노력한 결과물이 고작 배은망덕한 년을 만들어낸 것이다.
자기 아들과 결혼하는 게 뭐 어때서?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사촌끼리 혼인을 치렀는데 의붓남매가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가? 어차피 한 가족이라서 사돈 맺을 필요도 없고 심지어 예물도 아끼고 그야말로 일거양득이지 않은가?
유혁수는 마지못해 병실에서 나와 밖에서 당직 서는 마을 의사에게 말했다.
“쉽게 깨어나지 못하도록 수면제를 많이 사용해달라고 했잖아요. 어떻게 도망치게 놔둘 수 있어요?”
의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두려움에 떨며 전전긍긍했다.
“밥 먹으러 가서 잠깐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돌아와 보니 감쪽같이 사라질 줄 누가 알았겠어요? 아니면... 저분한테 물어보세요.”
그리고 옆방 병실을 향해 입을 삐쭉거렸다.
보건소에 병실이 두 개밖에 없고, 가운데 벽은 종이처럼 얇아서 인기척이 나면 분명 들리기 마련이다.
유혁수는 의사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최근에 한 군인이 입원했는데 계급이 꽤 높은 거로 알고 있다. 왜냐하면 군대에서 상대방의 요구가 무엇이 되었든 즉시 들어줄 수 있도록 마을 모든 사람에게 상시 대기하라는 전보까지 보내왔기 때문이다.
이내 손으로 얼굴을 때리자 험상궂은 표정은 순식간에 공손하게 바뀌었고, 옆방으로 다가가 입구를 가린 커튼을 사이에 두고 병실 안의 사람을 향해 말했다.
“실례합니다. 긴히 여쭤볼 일이 있어서...”
잠시 후, 정서준의 싸늘한 목소리가 뒤늦게 울려 퍼졌다.
“그 여자랑 무슨 관계입니까?”
상대방이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단번에 짐작할 줄 몰랐는지라 다급하게 눈알을 굴렸다.
“추태를 보였네요. 이름은 온서우라고 하는데 우리 아들과 꽤 오래 만났죠. 며칠 뒤면 혼인신고 할 예정인데 부잣집이라도 빌붙게 되었는지 별안간 파혼하겠다고 난리를 치더라고요. 아들이 집에서 서우가 아니면 싫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직접 찾아와 예물에 대해 상의해보려고 했죠.”
침대맡에 기대어 앉은 정서준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번졌다.
역시 그의 예상대로 속물적이고 현실적인 여자였다.
정씨 가문에 입양된 이상 선도동의 남자친구 따위 안중에 있을 리 없었다.
“혹시 어디로 도망갔는지 아세요?”
상대방이 묵묵부답하자 유혁수가 넌지시 떠보았다.
“아니요.”
유혁수는 감히 찍소리도 못하고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는 잽싸게 뒤돌아섰다.
그가 자리를 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보건소 입구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운전석 문이 열리자 카키색 군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급히 뛰어내리며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대대장님!”
멀쩡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정서준을 보자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지에서 긴급한 임무가 있다고 얼른 복귀하시라고 합니다. 은성으로 돌아가는 제일 빠른 기차표를 이미 끊었어요.”
“그럼 얼른 출발해. 꾸물거리지 말고.”
정서준은 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힐긋 쳐다보았고, 말을 마치지마자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젊은 남자가 재빨리 뒤를 따랐다.
곧이어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고, 정서준은 액셀을 끝까지 밟고 굉음을 내며 시골길을 질주했다.
기차역에 도착한 다음 차를 부대원에게 넘겨주고 곧 출발할 은성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덜컹, 덜컹.
녹색 열차가 선로 위에서 흔들거리며 앞으로 나아갔고, 창밖으로 풍경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객실 통로는 사람들로 꽉 찼고, 크고 작은 짐 가방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다들 검은색, 회색, 남색 계열의 옷을 입고, 여자는 머리를 땋거나 귀밑까지 오는 단발머리를 하고 남자는 5대5 가르마 또는 까치집이 되었지만 너나 할 것 없이 머리숱이 무성했다.
누군가 살아있는 가축을 데리고 기차에 탔고 대화하는 와중에 가끔 꼬꼬댁하는 소리까지 뒤섞여 시끌벅적하고 떠들썩했다.
양대주는 일반석 3장밖에 구하지 못했는데 심지어 이어진 자리가 아니라 각자 떨어져 앉았다.
결국 양대주와 지예슬은 앞쪽 객차에 온서우는 꼬리 칸에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온서우를 노리는 사람이 나타났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녀가 눈에 띄는 외모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새까맣고 윤기가 흐르는 양 갈래 땋은 머리는 어깨에 늘어뜨렸고, 백옥처럼 하얀 얼굴은 주먹만 했다. 보드라운 피부는 물기를 머금은 듯한 촉촉했고, 맑고 아름다운 눈동자와 오뚝한 콧날, 앙증맞은 콧방울까지 흠잡을 데 없다. 도톰한 입술은 혈색이 감돌았고 가지에 열매를 맺은 앵두를 연상케 했다. 부드러운 입매 덕분에 무표정일 때도 입꼬리는 항상 호를 그리고 있다.
그야말로 귀엽고 매혹적이며 순수하고 섹시했다.
과장을 보태면 지나가던 강아지도 쳐다보게 만드는 스타일이다.
온서우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말을 걸려고 애를 썼다.
“몇 살이죠? 취직은 했어요? 남자친구는 있어요? 집이 은성이에요? 아니면 친척이 계시나요?”
이 시대에 먼 길 떠나는 건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온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몰래 살폈다.
짙은 남색의 개량 한복을 입고 겨드랑이에 검은색 가방을 끼고 있는 그는 각진 얼굴에 검은 뿔테 안경을 썼다. 외모는 점잖은 편이고, 여느 정부에서 일하는 고위급 인사 같았다.
하지만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기 어려운지라 아직 모든 게 낯선 환경에서 항상 경계심을 가져야 했다.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대화를 시도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전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물론 악의도 없고. 저는 은성 군악대 인사과 과장인데 외모가 예쁘장하니 혹시 군악대에 입단할 생각이 있는지 궁금해서요. 원하시면 내부 추천도 가능해요. 시험도 건너뛰고 특채로 합격시켜 줄게요.”
온서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맙지만 관심이 없어요.”
그녀가 거절하자 주위에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던 여자들이 되레 혹했다.
이내 안경을 쓴 남자한테 우르르 몰려들어 질문을 던졌다.
온서우의 옆에 서 있던 아주머니가 이를 보자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아가씨, 아무리 기를 써도 군악대에 못 들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단칼에 거절하지? 무려 7천 원이라는 월급을 따박따박 받으며 의식주까지 돈 한 푼 쓰지 않는 훌륭한 직장을 어디 가서 찾는다고 그래? 그뿐만 아니라 보아하니 아가씨도 남편감을 찾을 나이가 된 것 같은데 외모가 워낙 뛰어난 편이라 만약 군악대에 들어가게 된다면 군 장교와 접촉할 기회가 반드시 생길 것이고, 나중에 마음에 드는 간부와 결혼해서 남은 생을 걱정 없이 살아도 된다고.”
아주머니는 온서우의 귓가에서 쉬지 않고 조잘거렸다.
그러다 무심코 건너편 안경 쓴 남자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의 수상한 모습을 단숨에 포착한 온서우가 그녀를 향해 문득 물었다.
“혹시 아주머니도 딸이 있어요?”
여자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서우가 피식 웃었다.
“군악대가 그렇게 좋은 직장이고 인사과 과장도 이 자리에 있는데 얼른 딸 대신 좋은 기회를 쟁취해야 하지 않나요? 나중에 따님이 군 장교와 결혼하게 된다면 아주머니는 무려 간부 사위를 둔 장모님이 될 것이며, 열차를 타도 편하게 앉아서 가는 좌석을 구할 수 있고 굳이 서서 갈 필요 없잖아요.”
온서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통로 건너편 대각선 앞쪽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