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1974년, 선도동 동쪽에 있는 보건소.
저 멀리 황토로 만든 단층집 세 채가 나란히 붙어 있고, 외벽에 붉은색 페인트로 칠해진 대문짝만한 문구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역경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자.]
어떤 중년 여성이 다급한 발걸음으로 다가와 대문의 가림막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팔에 걸친 가방을 침대맡에 내려놓고 손을 뻗어 병상에 누운 여자아이를 흔들었다.
“딸! 얼른 일어나 봐. 정씨 가문에서 사람을 보냈는데 마을 입구에 차를 대고 널 기다리고 있어.”
온서우는 성화에 못 이겨 비몽사몽 눈을 떴다.
눈앞에 청색의 삼베옷을 입고 귀밑까지 내려온 단발머리를 한 여자를 바라보자 왠지 모르게 올드한 느낌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줌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아줌마는 무슨! 얘가 넘어지더니 머리라도 다쳤나? 난 네 엄마잖아!”
그녀는 바로 온서우의 어머니 이정선이다.
이정선은 급히 딸의 팔을 잡고 침대에서 일으켜 앉힌 다음 허리를 굽혀 바닥에 놓인 천으로 만든 검은색 신발에 신겨주었다.
“서둘러! 짐은 내가 대신 쌌어. 만약 새아빠와 그 멍청이의 눈에 띈다면 넌 영원히 동네를 벗어날 수 없을 거야. 엄마 말 잘 들어. 정씨 가문에 도착해서는 허송세월하면 절대 안 돼.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라지 마. 정씨 가문 형제가 아주 유능하다는 소문이 있던데 둘 중 아무한테 시집가도 남은 생은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살 수 있다고. 최악인 상황이라고 해도 공군 관사에 잘나가는 남자들이 널렸기에 뛰어난 외모를 가진 네가 마음먹고 유혹한다면 충분히 매료당하고도 남을 거야. 나중에 조건이 제일 괜찮은 사람을 선택해서 결혼하고 시댁에 좋은 일자리를 알선해달라고 부탁하면 앞으로는 시름 놓고 살아도 돼.”
“그리고, 특히 지예슬을 조심해. 비록 같은 마을 출신이지만 부모님을 여의어 정씨 가문에 입양되면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지라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모든 면에서 우선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해. 자! 얼른 따라와.”
온서우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정선은 왼손으로 침대맡에 내려놓은 가방을 들고 오른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마을 입구까지 뛰어갔다.
두 사람이 나서는 순간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옆 방 병상에 누워 쉬고 있던 남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라지 말라고? 웃기고 있네! 감히 우리 집안을 이용해 먹으려고 해? 평생 그런 기회를 잡지 못하도록 해주지.’
칠흑처럼 검은 눈동자에 경멸이 스쳐 지나갔고, 잘생긴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설령 병상에 누워있더라도 온몸으로 뿜어내는 카리스마는 감출 수 없었다.
185cm의 큰 키, 넓은 어깨와 쭉 벋은 다리, 카키색 공군 제복을 맞춰 입고 탄탄한 허리에 검은색 벨트를 한 채 검은 군화를 신은 남자 때문에 보건소 병상이 유난히 비좁게 느껴졌다.
그는 바로 온서우의 어머니가 언급했던 정씨 가문 형제 중 장남인 정서준이다.
원래는 멀리 떨어진 은성에 있었지만 며칠 전 비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우연히 선도동 인근 고공에서 전투기가 고장이 나 관제탑에 신호를 보낸 다음 비행기를 과감히 포기하고 비상 착륙했다.
조종사는 몸에 상처를 입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에 착륙 후 가장 먼저 현지 보건소를 찾아갔다. 다행히 약간의 찰과상만 있어서 약을 바른 다음 병상에 누워 컨디션을 회복하면서 부대원이 데리러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옆방 모녀의 기가 막힌 대화를 엿듣게 될 줄은 몰랐다.
정서준은 모녀의 신원을 알고 있다.
지난달, 집에서 보낸 전보에 따르면 아버지의 부하 두 명이 전사했는데 딸들을 입양할 계획이라고 했다.
한 명은 지예슬, 다른 한 명은 온서우였다.
남자에게 빌붙어 팔자를 피려고 하는 사람이 바로 온서우이다.
선도동 마을 입구.
커다란 군용 지프차가 구석에 잠자코 멈춰 있었다.
이는 은성 자동차 공장에서 만든 BJ212형으로 군대 수뇌부 전용 차량이다.
온서우는 이정선에게 이끌려 쉬지 않고 지프차가 멈춰 선 곳까지 뛰어갔다.
차에서 일찌감치 기다리고 있던 양대주가 모녀를 보자 각진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머님, 서우야.”
양대주는 정서준의 아버지 정상철의 경호원으로 이번에 온서우를 데리러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비록 미리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이정선은 그래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대주 씨, 우리 서우는 먼 길 떠난 적이 없어서 수고스럽겠지만 가는 길에 잘 좀 챙겨주세요.”
양대주가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은성까지 무사히 도착하도록 할게요.”
이정선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손에 든 천 가방을 온서우의 어깨에 걸쳐놓고 애틋한 눈빛으로 딸의 얼굴을 만졌다.
“은성에 도착하면 엄마한테 편지를 꼭 보내.”
눈을 뜨자마자 강제 기상 당하고 낯선 아줌마에게 이끌려 마을 입구까지 허둥지둥 뛰어온 온서우는 아직도 기분이 얼떨떨했다. 하지만 눈앞의 여자가 그녀를 향한 감정은 고스란히 느껴졌고, 부득이하면서도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이내 마치 누군가에게 의식이 통제당한 듯 창문을 내리고 밖에 서 있는 여자를 향해 손까지 흔들었다.
“엄마, 잘 지내요.”
“얼른 가.”
이정선은 코끝이 시큰거리더니 허공에 멈춰 있던 손을 들어 다시 작별 인사했다.
지프차는 점점 멀어져 갔다.
마을 입구에 서서 차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는 이정선의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차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덜컹거리며 달렸다.
뒷좌석에 앉은 온서우의 옆에 다른 여자 한 명이 더 있었다.
“서우야.”
그녀는 한 손으로 어깨에 늘어뜨린 땋은 머리를 배배 꼬며 온서우에게 인사를 건넸다.
온서우가 고개를 돌렸고,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누구...?”
여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 지예슬잖아. 벌써 잊었어?”
‘지예슬?’
이내 머리가 띵하며 그제야 무슨 상황인지 깨달았다.
그녀는 소설 속으로 타임슬립한 것이다!
선도동, 정씨 가문, 공군 관사, 지예슬...
무려 룸메이트가 쓴 [1970년대의 미운 오리 새끼]라는 소설과 내용이 똑같지 않은가?!
누군가 온서우에게 룸메이트가 인터넷에 소설을 올렸는데 화풀이로 그녀도 등장시켰다며 얼른 확인해보라고 몰래 알려주고 사이트까지 공유했다.
사이트에 접속해서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니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소설 속 여조연은 그녀와 이름이 똑같을 뿐만 아니라 외모, 몸짓까지도 거의 판박이 수준이었다.
더욱 화가 나는 건 여자 주인공 지예슬의 미운 오리 새끼 버전이 바로 온서우라는 점이다.
지예슬이 긍정적인 인물의 표본이라면 그녀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의 대명사였다.
두 사람 모두 애국 열사의 후손으로 동시에 정씨 가문에 양자로 입양되어 군 관사에서 생활했다.
정씨 가문에서 여주인공 지예슬은 부지런하고 의욕적이며 사려 깊은 처신 덕분에 모두에게 칭송받는 존재였다.
나중에 최고 명문대에 입학해 졸업하고 나서 복지 혜택이 뛰어난 직장을 찾아 남편까지 잘 만나 아들딸을 낳았다. 게다가 그녀를 사랑해주는 시댁 식구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정씨 가문 덕분에 아무런 노력 없이 여생을 행복하게 보냈다.
반편, 여조연 온서우는 본의 아니게 지능이 저하된 비교 대상 신세가 되었다. 정씨 가문에 입양된 이후로 손님으로서 응당 지켜야 할 예의가 없을뿐더러 교활하고 게으르며 욕심이 많아 지예슬을 넘어서려고 매사에 공로를 가로채지만 번번이 역효과만 났다.
또한 외모만 믿고 오로지 남자 덕을 보려고 관사에서 여러 사람과 동시에 썸을 타는 꽃뱀으로 활약하다가 나중에 들통이 나서 이미지가 바닥을 쳤다. 오히려 일편단심에 지고지순한 지예슬이 모든 남자의 여신으로 등극했다.
그리고 운명의 나락으로 떨어진 계기가 생겼는데 바로 정씨 가문의 두 아들을 건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장남인 정서준을 유혹하다가 실패하자 곧바로 차남인 정재욱의 육체를 노리려고 했다.
결국 그녀는 정씨 가문의 공분을 제대로 사면서 모든 사람을 실망하게 했다.
음모가 들통나서 정씨 가문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딱히 선택의 여지가 없어 예전에 썸을 타던 남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가정폭력은 물론이고 성격마저 쓰레기였고, 시댁 식구도 호락호락한 사람들이 아닌지라 번갈아 가며 괴롭혔다. 어쩌다 보니 마흔도 채 되지 않아 기력을 다해 할머니처럼 초췌해졌고, 나중에 46살 엄동설한에 생을 마감했다.
아무런 노력 없이 좋은 사람을 만나 평생 행복하게 사는 여자가 있는 반면 명예와 이익을 위해 아무리 발버둥 치고 노력해도 세상의 고초를 피치 못하는 여자도 있다고 하더니, 틀린 말은 아닌 듯싶었다.
소설을 읽고 나서 온서우는 열 받아 3일 동안 굶었다. 아무리 멍청한 사람이라도 재력과 권력을 거머쥔 정씨 가문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작가는 기어코 여조연을 저능아로 만들어 바보만도 못한 캐릭터로 묘사했다.
마치 화를 자초하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허구한 날 정씨 가문을 들쑤시고 다니며 난리를 피우지 않겠는가?
결국 소설에 과몰입한 나머지 가슴이 답답해서 화병이 나 죽을 뻔했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타임슬립해서 소설 속 여조연 온서우가 된 것이다.
한편, 뾰로통한 얼굴로 가슴을 들썩이는 온서우는 욕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서우야? 왜 그래?”
지예슬이 손을 뻗어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온서우는 주먹을 들어 머리를 가볍게 내리쳤다.
“미안해요. 며칠 전에 부주의로 넘어졌는데 의사 선생님이 가벼운 뇌진탕일 지도 모른다며 집중력이 자주 흐트러진다고 했거든요.”
지예슬은 그녀의 머리를 힐끗 쳐다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니야. 넋을 잃고 있기에 은성에 가기 싫어하는 줄 알았어.”
온서우는 지예슬에 대해 딱히 호감이 없었다.
왜냐하면 화풀이로 그녀를 픽션에 등장시킨 룸메이트의 이름이 바로 지예슬이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 속 캐릭터와 현실 속 장본인은 본질적으로 같은 부류의 사람이다.
온서우는 그녀를 무시하고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몇 시간 후, 드디어 도심의 기차역에 도착했다.
이제 은성에 가기 위해서 24시간 꼬박 기차를 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