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거울에 비친 등 어멈은 기쁨에 가득 차서 말했다.
“네, 네. 기억했습니다. 정말 어떻게 왕비 마마께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사옵니다. 오늘부터는 제가 왕비 마마를 모시겠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겠지만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등 어멈은 그 말과 함께 비녀를 손에 들고 낙청연의 머리에 꽂아주려 했다.
바로 그 순간, 낙청연의 눈빛이 번뜩였고 그녀는 잽싸게 등 어멈의 손을 잡고서는 그녀와 마주 보고 섰다.
등 어멈은 깜짝 놀라더니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물었다.
“왕비 마마, 왜 그러십니까?”
낙청연이 손에 힘을 주자 등 어멈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손에 힘을 풀었고 비녀가 바닥에 떨어졌다.
상대는 낙청연의 뜻을 알아채고는 살벌한 눈빛을 하며 재빨리 탁자 위에 있는 다른 비녀를 들어 낙청연을 찌르려 했다.
등 어멈은 힘이 아주 셌고 낙청연은 버티지 못하고 그녀에게 밀쳐져 바닥에 쓰러졌다. 서늘한 빛이 감도는 비녀는 마치 예리한 칼날처럼 그녀의 눈동자 위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등 어멈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비녀로 그녀의 눈알을 찌르려 했다.
액살을 구분해내는 것은 풍수사(風水師)가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었다. 낙청연은 등 어멈의 눈동자가 초록색으로 빛나는 걸 보고는 곧바로 상대가 무엇인지 알아챘다.
“몹쓸 놈, 죽어라!”
낙청연은 등 어멈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에서 갑자기 힘을 풀었고, 그 바람에 뾰족한 비녀가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낙청연은 날렵한 몸짓으로 고개를 한쪽으로 피했고 동시에 등 어멈의 복부를 주먹으로 치고 그녀를 걷어찼다.
그리고는 벌떡 몸을 일으켜 등 어멈의 몸 위로 올라타서는 손가락을 씹어서 피를 낸 뒤에 등 어멈의 이마에 부적을 적기 시작했다.
부적이 완성되는 순간 등 어멈의 이마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등 어멈은 고통스러운 듯 몸을 비틀었다. 등 어멈은 얼굴은 사정없이 찡그리면서 끊임없이 비명을 내질렀다.
정원에 있던 하인들은 그 처참한 비명에 등골이 오싹했다. 그들은 한데 모여서 수군덕거리기 시작했다.
“왕비 마마께서 학대하시는 건 아닐까?”
“저렇게 울부짖는 걸 보니 아마도 맞는 것 같네.”
…
검은 연기가 흩어져서 사라지는 순간, 청색의 그림자가 재빨리 탁자 밑으로 지나가더니 방문 밖으로 사라졌다.
낙청연은 미간을 구긴 채로 정신을 잃은 등 어멈을 바라봤다. 등 어멈의 집안에서 건드린 것은 예사 물건이 아니었다. 낙청연은 그저 작은 충돌이 있었던 줄로 알고 간단히 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다.
생각해보면 죽은 이를 기리는데 은표를 태웠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등 어멈은 서서히 정신을 차리더니 바닥에서 일어나며 멍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왕비 마마, 제가… 제가 어찌 여기 있는 것입니까?”
낙청연은 손수건으로 손가락에 묻은 피를 닦으며 질문했다.
“네 마지막 기억에서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어젯밤 저는 왕비 마마의 말씀대로 저택을 나섰고 먼저 약을 지어서 어머니께 드렸습니다. 하지만 너무 늦은 시각이라 감히 무덤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오늘 아침 일찍 가서 은표와 노잣돈을 태우고는 곧장 저택으로 돌아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바로 저택 안에 있다니…”
등 어멈은 곤혹스러웠다. 그녀는 이마가 축축한 기분이 들어서 손을 들어 이마를 만져봤는데 피가 흥건해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낙청연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놀랄 것 없다. 너희 집안일은 끝나지 않았다. 어떤 것들은 사특한 방법을 통해 인간이 되려 하지. 이 세상에는 법칙이라는 게 있고 운명이라는 게 있다.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듯이 나쁜 일에는 나쁜 결과가 따르는 법이다.”
낙청연은 탁자 앞에 앉으면서 부적 두 장을 그렸다.
등 어멈은 그녀의 뜻 모를 말에 등허리가 서늘했다. 입을 열어 그녀에게 물으려는데 낙청연이 말을 이어갔다.
“정도(正道)를 걷고 싶다면 내가 도와주마. 날 만난 것 역시 네 운명이니 말이다.”
등 어멈은 얼떨떨했지만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도가 좋지요. 정도가 좋습니다.”
낙청연은 고개를 들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대들보 쪽을 쳐다봤고 청색의 무언가는 급히 몸을 숨기더니 이내 사라졌다.
이어서 그녀는 두 장의 부적을 등 어멈에게 건네주며 당부했다.
“하나는 너희 어미의 침상 머리맡에 붙이고 다른 하나는 네 침상 머리맡에 붙이거라. 그리고 편옥(偏屋)에 이름이 적히지 않은 위패를 모셔놓고 하루에 향을 세 개씩 피우거라. 그렇게 하면 집안에 별일 없을 것이다. 어쩌면 좋은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지.”
등 어멈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건을 건네받았고 바로 옷 속에 집어넣었다.
“그럼 지금 당장 집으로 가서 일을 처리할까요?”
“그래. 맹 관사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얼른 가서 일 보거라.”
맹금우의 어머니가 돌아온다면 등 어멈은 저택을 나가기 더욱 어려워질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가보겠습니다.”
등 어멈은 곧바로 방을 나섰다. 그녀는 낙청연의 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등 어멈이 떠나기 무섭게 낙청연은 고개를 들어 대들보를 바라보며 말했다.
“얼른 가지 않고 무엇하느냐?”
청색의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
등 어멈은 조금 전 겪었던 기이한 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오싹한 기분과 함께 온몸에 소름이 돋은 그녀는 자신이 머리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을 깜빡했고 그렇게 대놓고 낙청연의 정원에서 나왔다. 그 바람에 적지 않은 하인들이 입방아를 찧어댔다.
“세상에나, 머리에 피가 흥건하네.”
“왕비 마마도 정말 잔인하시네. 정말 너무 무서워.”
얼마 지나지 않아 왕비가 하인을 학대했다는 소문이 왕부의 내원에 퍼졌다.
등 어멈은 낙청연이 말해 준 일을 곱씹는 데 여념이 없었기에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로 저택을 떠났다.
저택의 다른 이들이 보기에 등 어멈은 맞아서 멍청해진 건지 정신을 반쯤 놓은 채로 저택을 나서는 것으로 보였다.
“아, 참. 오늘 왕비 마마의 점심 식사를 책임진 자는 누구지? 왜 아직도 가져다주지 않은 거야?”
누군가 궁금한 듯 물었다.
“세상에, 잊고 있었네.”
장미(薔薇)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조금 전 등 어멈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떠나는 모습을 떠올리니 너무 불안했다. 그래서 그녀는 옆에 있던 지초(芝草)를 밀면서 명령조로 말했다.
“네가 가.”
지초는 그녀에게 밀쳐져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거절하고 싶었으나 그럴 용기가 없었기에 지초는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낙청연이 나침반을 꺼내 들었는데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렸고 뒤이어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 왕비 마마, 점심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낙청연은 나침반을 다시 넣었고 조금 놀랐다. 이 저택에서 그녀를 왕비라 생각하는 계집종은 없었고 차와 물을 가져다줄 때 이렇게 태도가 공손한 이도 없었다.
“들어오려무나.”
뒤이어 계집종 한 명이 들어왔다. 열다섯, 열여섯 정도 돼 보였는데 몸이 말랐고 낙청연을 두려워하는 건지 시선이 아래를 향해 있었다. 계집종은 음식을 그녀의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 소인이 점심 식사를 늦게 가져왔습니다. 소인을 벌해주시옵소서.”
지초는 등 어멈이 피를 뒤집어쓰고 있던 모습이 떠올라 두려움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리고 낙청연은 재밌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
“이 저택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나 보구나?”
지초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온 지 보름 정도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후원에서 잡일을 맡았었고 오늘부터 내원에서 청소하게 되었습니다.”
낙청연은 그녀의 목소리에 기력이 없음을 느끼고는 흥미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개를 들어보아라.”
지초는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고 감히 낙청연을 쳐다보지 못했다.
낙청연은 그녀의 눈동자에 흰 기운이 드리워져 있고 광대뼈에는 청자색이 감도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병을 앓고 있었고 이제 수명이 1년 정도 남은 듯했다.
낙청연은 지초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었는데 지초는 화들짝 놀라면서 몸을 굳히며 두려움에 떨었다.
맥을 짚어본 낙청연은 지초가 과로로 인해 병을 앓고 있다는 걸 알고는 깜짝 놀랐다.
바로 그때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낙청연은 살짝 놀란 얼굴로 지초에게 그녀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지초는 고달픈 운명을 타고난 자였다.
낙청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소매 안에서 나침반을 꺼내 들었다. 지초는 불운한 운명을 가진 자였고 낙청연은 다른 사람의 운명을 바꿔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일 같지만 지초가 자신을 만난 것 또한 지초의 운명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지초 인생에서의 변수였다.
“마침 내 곁에서 시중을 들 계집종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오늘부터 내 옆에서 시중을 들 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