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정은지는 한아진이 무슨 속셈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슬쩍 한아진이 감싸온 팔을 밀어내며 가볍게 웃었다.
“괜찮아, 나는 반장 옆에 가서 앉을게.”
한아진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저지하려 했지만 정은지는 이미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렇게 정은지는 반장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반장은 착실해 보이는 남자로 금테 안경을 쓰고 있어 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정은지는 학창 시절 그의 성적이 아주 좋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자신도 성적이 나쁘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금세 대화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고하준은 정은지가 들어온 후 한 번도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것을 보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는 원래 정은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리 예뻐도 너무 개성이 강하고 최신 유행을 따르는 그녀는 늘 별난 옷차림으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반면 고하준이 좋아하는 것은 감성적이고 뼛속까지 요염한 그런 여자였다.
하지만 오늘 밤 그는 정은지가 자신의 이상형인 그런 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이상한 옷차림을 버리고 언제든 감성적인 여자로 변신할 수 있었다.
이런 타입이 바로 고하준의 취향이었다.
한아진은 고하준의 기분을 눈치챘는지 다가와서 위로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요. 혹시 모르잖아요. 은지가 밀당을 하고 있는 건지도. 그동안 하준 씨한테 그렇게 푹 빠져 있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멀리할 수 있겠어요?”
고하준은 잠시 생각하더니 한아진의 말이 맞다고 여겨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한아진은 그늘진 곳에 숨은 채 정은지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의심하며 그녀의 행동을 예리하게 지켜봤다.
정은지 역시 그 날카로운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그 시선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전생의 정은지를 죽인 사람은 바로 한아진이었다. 때문에 웃으며 한아진에게 다가갈 수 없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기에 정은지는 그녀와 함께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정은지는 샴페인 잔을 들고 한아진에게 다가갔다.
“아진아, 여기 너무 지루해. 뭐 재미있는 거 없어?”
한아진은 그녀가 다시 다가오자 경계심을 내려놓고 기쁘게 웃었다.
“당연히 있지. 이런 자리에서는 술 마시며 즐겨야 하는 거야. 자, 은지야, 친구로서 내가 너한테 한잔 따라줄게.”
그러자 정은지는 고개를 숙이며 살짝 웃고는 자연스럽게 잔을 받았다.
“은지야, 너 매일 여준수 씨 그 차가운 얼굴 보고 있느라 마음이 힘들지? 오늘 밤 제대로 취해보자. 기분 좀 풀어.”
“그래.”
이렇게 대답하며 정은지는 잔을 비웠고 한아진은 재빨리 그녀에게 또 한 잔을 따라주었다.
자신이 술이 약하다는 걸 잘 알기에 정은지는 미리 숙취해소제를 먹고 왔기 때문에 마음 놓고 마실 수 있었다.
몇 잔을 연거푸 마시자 정은지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천천히 말했다.
“나... 나 안 되겠어. 머리가 너무 아파.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 말에 한아진은 알게 모르게 웃음을 지으며 속으로는 기뻐하면서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내가 같이 가줄까?”
“아... 아니야. 괜찮아. 나 혼자 다녀올 수 있어.”
정은지는 바로 거절하고는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그러자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한아진은 잔 속의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곧이어 그녀는 고하준에게 다가가 호텔 카드키를 건넸다.
“하준 씨, 은지 취했어요. 방금 나갔는데 호텔까지 좀 데려다줄 수 있나요? 여기 카드키예요.”
고하준은 즉시 카드를 받아들였다. 애초에 거절할 리가 없었다. 오늘 밤 정은지의 그 차림새는 완전히 그의 마음을 흔들어놓았으니 말이다.
이내 고하준은 정은지를 따라나섰지만 웬일인지 그녀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하준은 턱을 어루만지며 다른 복도로 들어섰다.
이때, 한아진은 핸드폰을 꺼내 재빨리 문자를 작성해 여준수에게 보냈다.
“여준수 씨, 저랑 은지가 동창 모임에 왔는데 은지가 술을 좀 마셨거든요. 고하준 씨가 방금 은지를 방으로 데려갔어요. 혹시 두 사람이...”
같은 시각, 이준 그룹.
여준수는 방금 회의실에서 나왔다. 그는 오늘 오후 내내 회의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 핸드폰을 볼 시간이 전혀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불안한 기분이 들어 핸드폰을 켜보니 정은지가 보낸 사진이 보였다. 연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꽃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여준수는 정은지의 그런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기에 한동안 멍하게 쳐다봤다.
바로 그때, 핸드폰 알림음이 울렸고 한아진이 보낸 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곧이어 몇 초 만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