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나는 말끝에 정중한 예까지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어마마마는 이를 악문 채 발을 구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바마마는 혀를 차며 말했다.
“공주가 이해하거라. 네 어마마마는...”
곧이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젊었을 적엔 그러지 않았는데, 요즘은 친정의 영향 때문인지 점점 더 판단이 흐려지는 듯하구나.”
하지만 나는 어마마마는 예전부터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마마마가 변한 것이 아니라, 예전엔 내가 묵묵히 참았을 뿐이었다.
대의를 위한다는 명분과 체면을 핑계로 세자의 횡포를 견뎌왔고, 내가 받은 모욕은 속으로 삼키며 입을 다물었었다.
덕분에 어마마마는 강직하고 도량 넓은 중전이라는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었고, 아무도 그녀의 진짜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 나는 더는 그런 호구로 살고 싶지 않았다.
‘내 눈물로 누군가의 평온을 지켜주는 어리석은 삶은 이제 끝났어.’
아바마마와 한동안 다정히 이야기를 나눈 뒤, 나는 공손히 인사하고 편전을 나섰다.
몇 걸음 가지 않아 길가에 웅크리고 있던 안 상궁이 불쑥 다가오더니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공주마마, 궁 밖으로 나간다 해서 모든 것이 뜻대로 되는 건 아니옵니다. 중전마마께선 전하께선 말릴 수 없었지만, 공주마마께는 전할 말이 있다고 하셨사옵니다.”
안 상궁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형제 간의 정은 아무리 멀어져도 끊어지지 않는 법, 세자 저하와 틀어져 봐야 공주마마께 좋을 게 무엇이옵니까? 이 궁중에서 얼마나 많은 왕자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지 모르시진 않겠지요?”
“형제간의 정은 아무리 소원해져도 끊어지지 않는 법이지요. 세자 저하와 등을 지는 것이 공주마마께 무슨 이익이 되겠사옵니까? 궁 안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왕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시진 않을 터... 공주마마와 세자 저하는 한 몸이옵니다. 세자 저하께서 위태로우면 공주마마도 무사치 못하실 것이니, 깊이 새기시옵소서!”
말을 끝낸 안 상궁은 고개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섰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생각에 잠겼다. 비열한 협박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말이 전부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지금 나를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는 이는 아바마마 한 분뿐이었지만, 세자 측은 어마마마를 필두로 권경현, 그리고 그를 따르는 대신들까지 똘똘 뭉쳐 있었다.
‘저 셋은 이미 나를 제거하려 마음먹었고, 그 결속력도 대단해.. 나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야.’
나는 자연스럽게 다른 왕자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문득, 한 인물이 머릿속에 선명히 떠올랐다.
‘경헌대군 이헌!’
보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은밀히 한 찻집의 밀실로 향했다. 두건을 벗자, 익숙한 얼굴이 나를 반겼다.
“연우야, 그동안 잘 지냈느냐.”
나는 가볍게 웃으며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라버니,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는 셋째 왕자인 경헌대군, 이헌이었다.
지금 대성의 조정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은 실은 세자가 아니라 이헌 오라버니였다.
문무를 겸비하고 품격까지 갖춘 그는, 비록 친모의 신분이 낮다는 흠이 있지만, 조정의 중신들 사이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왔고 은밀히 지지받는 인물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가 윤정왕후의 소생이었다면, 지금쯤 정통 계승자로서 흔들림 없는 입지를 가졌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정실 소생은 아니었지만, 능력과 명망만 본다면 이휘는 그 앞에서 감히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적의 적은 곧 동지요. 내가 이휘를 무너뜨리고자 한다면, 의 가장 큰 위협인 이헌 오라버니와 손을 잡는 것이 제일 나은 선택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