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희연아, 입 다물어!”
안영해가 버럭 소리쳤다.
“아, 진짜! 시끄러워 죽겠네!”
곧 옆에서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던 안준택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짜증스럽게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였다.
“희연 누나의 물건은 누나 본인이 갖고 있으면 안 돼요? 성인이고, 결혼도 했는데! 왜 우리 집에 둬요? 오늘 다 가져가! 다 가져가라고! 뭔 일이 이렇게 많아? 보기만 해도 짜증 나!”
안희연은 기뻤다.
어머니의 유품을 가져가는 것이 오늘 그녀의 목표였는데 안준택이 뜻밖에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안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남유리의 유품은 대부분 시가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값비싼 물건들이었기에 김해경, 안영해, 민채린, 안수지 그 누구도 안희연에게 돌려주고 싶지 않았다.
김해경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손자의 손을 잡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준택아, 저건 다 네 돈인데 희연이가 가져가면 너는 어떡하니?”
“할머니! 그건 희연이 돈이에요! 희연이 엄마가 희연에게 남긴 건데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준택은 옆에 있던 골동품 장식을 들고 나가면서 고현준에게 물었다.
“매형, 누나 물건인데, 안 도와줄 거예요?”
까칠한 소년의 말투는 무례했지만 고현준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보석함 두 개를 들고 짐꾼 노릇을 자처했다.
안영해는 말리려 했지만 고현준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게다가 이 물건들은 모두 안희연 어머니의 유품이었기에 유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그가 무슨 자격으로 계속 가지고 있겠는가?
가지고 있을 자격도 없을뿐더러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안영해는 속이 쓰렸지만 가정부들에게 짐을 옮기도록 시켰다. 곧 안희연의 G바겐에 유품들이 가득 실렸다.
김해경은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리며 민채린과 안수지를 노려보았다.
다 이 두 못난 것들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것이었다.
“고 서방, 희연아, 곧 점심시간인데, 밥 먹고 가야지?”
안영해는 고현준과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아뇨, 오후에 수업이 있어서요.”
안희연은 이 집에 더 있다간 소화불량이 될 것 같았다.
안수지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고현준을 바라보았다.
“현준아, 오늘 네가 좋아하는 요리 만들었어.”
아직 이혼도 안 한 남편을 대놓고 유혹하는 모습이 역겨웠다. 안희연은 참지 못하고 눈을 희번덕거렸다.
곧 남남이 될 사람에게 신경 쓰기도 싫어 그녀는 그냥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안준택이 입을 열었다.
“매형은 당연히 누나를 데려다주겠지. 설마 혼자 남겠어?”
안준택은 ‘너 제정신이야?'라는 눈빛으로 안수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희연은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전에는 왜 안준택에게서 이런 귀여운 면을 못 봤을까?
안희연은 어른들 앞에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언니, 속셈이 너무 뻔히 보여. 좀 꼴불견이야.”
안수지의 얼굴이 살짝 굳었지만 금세 표정을 바로잡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마치 안희연의 억지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희연아, 나랑 현준이는 오랜 친구 사이야. 너도 이제 철 좀 들어야지. 괜히 오해하고 엉뚱한 소리 하지 마. 보기 안 좋아.”
“누가 얘 얼굴 때렸어요?”
고현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조금 전까지 죽은 아내의 유품을 걱정하던 안영해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식은땀이 흘렀다.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고현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눈빛에는 엄청난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그, 그게... 오해였어...”
한참 후, 안영해는 압박감에 못 이겨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안희연에게 사과했다.
“희연아, 아빠는 아까 화가 나서 그랬어. 아빠는 악의가 없었어! 앞으로 절대 안 그럴게. 절대! 고 서방, 걱정하지 말게!”
안영해는 손찌검을 할 때 고현준이 이렇게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안희연은 어이없고 우스웠지만 동시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수지를 감싸주려고 온 사람이 갑자기 내 뺨을 누가 때렸는지 묻는 건 무슨 심보야?
병 주고 약 주는 거 참 능숙하시네.”
안희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안영해는 다시 말했다.
“그 비취 목걸이는 네 채린 아줌마가 경매에서 꼭 낙찰받아서 너한테 돌려줄 거다.”
“알겠어요.”
안희연은 적당히 받아주기로 했다.
이미숙은 아직 병원에 있었고 안영해는 여전히 이미숙의 후견인이었기에 그와 완전히 등을 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
어머니의 유품을 되찾은 안희연은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조금만 크게 웃어도 왼쪽 뺨의 근육이 땅겨 아파서 움찔거렸다.
“괴롭힘당했으면 말을 해야지.”
조수석의 남자가 말했다.
“누구한테? 당신한테?”
안희연은 비꼬려다가 방금 안영해의 태도 변화가 고현준의 한마디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술집에서 그에게 날린 따귀가 생각나 조금 찔리는 마음도 들었다.
안희연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큼, 큼! 정씨 가문이 고소를 취하했는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그랬으면 나도...”
따귀를 날리지 않았을 텐데.
안희연은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어쨌든 고마워...”
“내가 한 거 아냐.”
고현준은 감추지 못하고 드러나는 그녀의 기쁨을 눈치채고는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할아버지 뜻이야.”
“아.”
안희연의 미소가 굳어졌다. 그녀는 애써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할아버지는 날 예뻐하셔.”
괜한 착각으로 혼자 창피당했다.
현준의 할머니가 도와줬다고 거짓말했는데 사실은 할아버지의 덕이었다니. 뭐 크게 다른 건 없었다.
“내가 너한테 잘 안 해 줬어?”
고현준이 물었다.
안희연은 정말 의아했다.
“내게 잘해 줬다고? 당신이? 당신이 내게 잘해 줬으면 내가 어젯밤에 그 꼴을 당했겠어?”
“안희연 씨, 고씨 가문 사모님 자리를 거부하면 그에 해당된 권리는 당연히 누릴 수 없지.”
안희연이 막 뭔가 말하려는 순간, 고현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고현준은 전화를 받았다.
“수지야.”
안희연의 생기 넘치던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길고 풍성한 속눈썹 아래로 깊은 슬픔이 드리웠다.
그녀는 힘없는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표정은 점점 심각해졌고, 곧 전화 너머로 알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희연아, 날 안씨 가문으로 데려다줘.”
고현준이 말했다.
안희연은 어이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안 씨 저택에서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안수지가 벌써 유난을 떠는 거야.
“내가 당신 운전기사야? 거기서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데려다 달래? 집까지 데려다주는 거로 되겠어? 아예 그녀 침대까지 데려다줄까?”
고현준은 분명한 질책의 어조로 그녀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렀다.
“안희연, 수지 손 다쳤대.”
“무슨 소리야?”
“수지 말로는 네가 실수로 밀쳐서 왼손이 아프다고 하더라.”
그녀가 언제 밀쳤다는...
잠깐, 안수지가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할 때 뿌리치긴 했지...
그런데 그 정도 힘으로 밀쳤다고 할 수 있어?
“걔 말을 믿는 거야?”
안희연은 어이가 없었다.
고현준은 담담하게 말했다.
“몽실아, 난 사실만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