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박지헌은 서다은의 등장에 아주 미세하게 동공이 흔들렸지만 이내 다시 담담한 얼굴로 손민재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손민재가 얼른 서다은에게로 가서 휴대폰을 받아오더니 이내 문을 확 닫아버렸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박지헌에게 건네주며 강하나를 향해 해명했다.
“대표님께서 휴대폰을 회사에 두고 오셔서 제가 서다은 씨한테 대신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어요.”
“네.”
강하나는 갑자기 이 모든 게 피곤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가식적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잘 아는 사람이 가식적으로 굴 때는 싫은 것을 넘어 혐오의 감정까지 든다.
“별일 없는 거 봤으니까 난 이만 가볼게.”
“하나야.”
박지헌이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마. 내가 어떤 마음인지는 자기가 더 잘 알잖아.”
그는 말을 마친 후 테이블 위에 있던 붕어빵 한 봉지를 그녀에게 건넸다.
“자기를 위해서 특별히 산 거야. 집에 가서 먹어. 아직 처리해야 할 회사 일이 산더미이기는 하지만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갈게. 그러니까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알겠지?”
박지헌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맞추려고 하자 강하나가 빠르게 피했다.
이정 그룹 근처의 붕어빵 가게는 보통 한 봉지에 8개를 넣어주는데 지금 눈에 보이는 붕어빵 개수는 고작 5개뿐이었다.
서다은의 말대로 정말 그녀가 먹다 남은 거였다.
싸한 분위기가 감돌고 박지헌은 붕어빵만 바라보는 강하나를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야, 설마 아직도 화가 안 풀린 거야?”
그러자 강하나가 고개를 돌며 옅게 웃었다.
“아니. 이제는 화가 안 나.”
그 말에 박지헌은 안도한 듯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자기라면 날 이해해줄 줄 알았어. 다시 생각해봐도 자기랑 결혼한 게 내가 한 선택 중에서 제일 잘한 선택 같아.”
그는 말을 마친 후 손민재를 바라보았다.
“하나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와.”
“네, 알겠습니다.”
강하나는 거절하지 않고 손민재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지은 죄가 있는 손민재 역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 주차장 입구까지 다다를 때쯤 강하나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사모님?”
손민재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강하나는 손민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3년 전 이정 그룹의 면접 대기 복도에서 눈물을 훔치던 한 남학생을 떠올렸다.
당시 손민재는 면접에서 떨어진 후 정말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그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하자 그는 더 서럽게 울더니 맹세하는 얼굴로 그녀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얘기해주세요. 그게 자잘한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뭐든 할게요!”
그 말에 강하나는 그저 한번 웃어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뭘 바라고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만한 오지랖이 또 없었다. 차라리 그때 그냥 지나치는 게 나았다.
“손 비서는 날 속인 것에 정말 조금도 미안한 마음이 안 들어요?”
그 말에 손민재의 몸이 움찔 떨렸다.
“사모님... 저, 저는 그저 두 분이 화해했으면 해서 그런 거예요... 대표님께서 사모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사모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사모님과 그간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건 그저 요즘 너무 바빠졌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용서해주세요.”
강하나가 피식 웃었다.
‘이렇게도 연기를 잘하는 사람인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때 업계를 바꿔보라고 조언할 걸 그랬네.’
“나는 내가 알아서 갈 테니까 손 비서는 다시 올라가요.”
“안 됩니다!”
손민재가 다급하게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외쳤다.
박지헌이 직접 지시한 일이기에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강하나는 집까지 데려다 놔야 했다.
“사모님, 저와 같이 집으로 가주세요. 제발요!”
그때 강하나가 갑자기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등을 돌린 채로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다.
“아까 병원에 도착했을 때 1층 로비에서 서다은 씨와 만났어요.”
그 말에 손민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새,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나 보네요...”
강하나는 뒤를 돌아 손민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 그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
하지만 손민재는 약 3분이라는 시간이 다 지나도록 결국 한마디의 진실도 내뱉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기회까지 완전히 놓쳐버렸다.
“갈게요. 앞으로도 늘 그렇게 제 몫을 다 하길 바라요.”
강하나는 말을 마친 후 주차자에서 나와 병원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사모님, 제가 댁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손민재가 끝까지 그녀를 따라왔지만 강하나는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병원 바로 앞에서 강하나를 기다리고 있던 이정인은 그녀를 보자마자 미소를 지으며 차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곧바로 운전석으로 가 시동을 걸고 병원을 완전히 벗어나 버렸다.
손민재는 바로 눈앞에서 강하나가 다른 차에 올라타는 것을 보고는 서둘러 박지헌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방금 사모님께서 다른 사람의 차를 타고 가버렸습니다.”
“다른 사람 누구?”
손민재는 직감적으로 강하나와 이정인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지만 그걸 대놓고 얘기할 수는 없었기에 최대한 에둘러 말했다.
“처음 보는 남자였습니다. 나이는 20대로 보이고 얼굴은 꽤 훈훈한 편이었습니다...”
박지헌은 그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큰소리로 화를 냈다.
“내가 분명히 하나를 집까지 데려다 놓으라고 했지? 고작 그 간단한 일도 처리 못 해?!”
강하나를 잡아두기 위해 벌인 쇼가 한순간에 생쇼가 되어버렸다.
“저... 저도 최선을 다했어요. 그런데 사모님께서 제 말은 들어주지도 않으셔...”
“이런 등신 새끼!”
박지헌은 전화를 끊은 후 바로 다시 강하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전원이 꺼져있다는 냉랭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
“정인아, 제일 빠른 항공편이 언제지?”
강하나의 말에 이정인이 휴대폰을 꺼내 검색해보았다.
“내일 아침 7시 반이 제일 빠른 거기는 한데 이건 너무 이르니까 오전 11시 반 거로 예매할까요?”
“아니, 7시 반 항공편으로 예매하는 게 좋겠다. 그리고 오늘 밤은 호텔에서 묵는 거로 해.”
“감독님, 사실 급하게 돌아갈 필요는 없어요. 마침 장연우 씨가 지금 소진시에 머무르고 있다고 하니까 가기 전에 연우 씨 한번 만나보지 않으시겠어요?”
이정인은 병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몰랐지만 강하나와 박지헌 사이에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대로 강하나와 함께 할리윌로 돌아가면 바로 영화 제작에 돌입해야 하기에 그때 가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작을 멈출 수 없다.
그래서 그는 강하나의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이곳에 잠시 머무르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
강하나는 오랜만에 듣는 장연우라는 이름에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장연우는 천재 시나리오 작가인 동시에 강하나의 열렬한 팬이기도 했다.
그는 강하나의 첫 영화를 보고 바로 매료되어 먼저 그녀에게 함께 작업하고 싶다는 구애의 메시지를 보냈다.
강하는 이에 흔쾌히 허락했다. 하지만 장연우가 시나리오를 다 집필하기도 전에 박지헌이라는 남자를 만나버렸고 그렇게 그녀는 사랑에 머리가 마비돼 커리어고 사업이고 다 내팽개쳐버렸다.
장연우는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꽤 오랜 시간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강하나와의 작업은 포기할 수 없었기에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이건 제가 하나 씨를 위해 쓴 시나리오니까 하나 씨가 아니면 함께 작업할 생각이 없어요. 만약 영원히 함께 작업하는 날이 오지 않는다고 해도 이걸 누구한테 팔 생각은 없어요. 무덤까지 가지고 갈 거예요.”
그 뒤로 수많은 사람이 그에게서 시나리오를 사려고 했지만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액수를 불렀는데도 그는 모두 단칼에 거절해버렸다.
강하나는 당시의 일을 회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소진시로 가자.”
이정 그룹.
손민재는 재무팀으로 가 팀장의 책상 위에 거래 명세를 던지며 말했다.
“크흠, 오늘 저녁 9시 전까지 잔금을 보내야 하니까 빨리 처리해주세요.”
그 말에 팀장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걸 회사 비용으로 처리하라고요?”
손민재는 찔리는 게 있어 팀장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며 말했다.
“당연하죠. 이 회사는 대표님 거잖아요. 그러니 회사 공금 역시 대표님 거나 마찬가지죠.”
“그게 무슨...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정 그룹의 대표는 박지헌이 맞으나 지분을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건 그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지분은 날이 갈수록 점점 적어지기만 했다.
그리고 공금을 이렇게 함부로 처리했다가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그 뒷감당은 오롯이 재무팀이 떠안게 될 테고 사태가 심각해지면 자칫 법적인 문제로도 이어지게 된다.
“저는 그저 대표님의 지시를 따른 것뿐이니까 뒷일은 팀장님이 알아서 처리하세요.”
손민재는 이 한마디만 던지고 부리나케 재무팀을 빠져나갔다.
팀장은 이에 미간을 사정없이 찌푸리더니 한숨을 내쉬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모님, 대표님께서 또 사적인 비용을 회사 비용으로 처리해달라고 하는데 이거 대신 처리해주실 수 있으세요?”
팀장은 이제껏 박지헌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키면 늘 강하나를 찾았다. 그리고 강하나는 그럴 때마다 군말 없이 대신 처리해주었다.
그런데 늘 상냥하던 강하나의 목소리가 오늘은 무척이나 쌀쌀맞게 들려왔다.
“나 그쪽 대표님과 이혼했으니까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이런 일로 전화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