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네? 이혼이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사모님? 사모님?!”
팀장은 끊어진 전화를 멍하니 바라보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대표님이 빌딩을 통째로 빌려 사랑 고백한 게 불과 세 시간도 채 안 됐는데 갑자기 이혼이라고? 부자들은 원래 다들 이러나?’
팀장은 한참을 어이없어하다가 이내 손에 들린 거래 명세서를 보고 이마를 짚었다.
“젠장, 나더러 뭘 어떡하라고!”
호텔 로비.
이정인은 카운터에서 키를 받고 있었고 강하나는 그 옆에 서서 재무팀 팀장이 보낸 거래 명세서를 훑어보았다.
송금처는 한 리조트 호텔이었고 예약한 방은 프리미엄 커플 룸이었다.
해당 리조트 호텔은 그녀가 일전 박지헌에게 보여준 호텔이었는데 당시 박지헌은 시간이 나면 함께 가기로 그녀와 약속을 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약속을 끝끝내 지키지 않았고 그녀가 아닌 서다은과 함께 그 시간을 즐겼다.
강하나는 사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서다은이야 굴러들어온 돌이라 그녀에게 갖가지 도발을 하며 일부러 한계까지 그녀를 몰아붙인다고는 하지만 박지헌은 왜 서다은이 그렇게 멋대로 하게 가만히 내버려 두는지, 강하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랑에 눈이 멀어 이성 따위는 집어 던진 걸까? 아니면 그녀와의 3년이 그에게는 그렇게도 하찮은 것이었던 걸까?
불행 중 다행인 건 그녀가 이제라도 정신을 차렸다는 것이었다.
그때 웬 금발에 파란색 눈을 가진 남자 한 명이 카운터 쪽으로 다가왔다. 190은 훨씬 넘어 보이는 키를 가진 남자는 셔츠 단추를 가슴이 다 보일 정도까지 풀어헤치고 상당히 요염한 자세로 카운터에 기댔다.
‘모델인가?’
잘생긴 남자들을 수도 없이 봐왔던 강하나도 저도 몰래 그를 빤히 바라보게 되었다.
시선이 너무 뜨거웠던 탓인지 남자는 고개를 돌려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고는 강하나가 무슨 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녀에게 손 키스를 날렸다.
‘가벼운 남자’ 이게 바로 그녀가 남자를 보고 느낀 솔직한 감상이었다.
가벼운 남자는 질색인 강하나는 곧바로 시선을 피하며 발걸음까지 옮겨 대기 소파에 앉았다. 그때 이정인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그녀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감독님, 저 사람이 바로 오거스트예요! 세상에,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뭐? 저 사람이?”
강하나는 그 말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촬영 감독치고는 너무나도 훌륭한 외모를 가졌기 때문이다.
오거스트는 카운터 직원과 뭐라고 얘기한 후 느긋하게 걸어와 강하나의 바로 옆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또다시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
오거스트는 강하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며 예쁜 미소를 흘렸다.
이대로 조금만 더 눈을 마주치면 분명히 자신에게 반할 거라는 아주 확신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강하나는 그 눈빛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무시하려고 했지만 업계 사람이기도 하고 또 언젠가는 함께 작업할 날이 올 수도 있기에 가벼운 미소로 회답했다.
그때 이정인이 드디어 키를 받아왔고 강하나는 이때다 싶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선 이정인은 조금 아쉽다는 얼굴로 말했다.
“감독님, 오거스트랑 얘기라도 나눠보지 그러셨어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촬영 감독인데 언제 같이 작업하게 될지 모르잖아요. 오거스트가 기괴한 행동을 많이 하기는 해도 실력은 최고라 그를 원하는 사람들이 한 트럭도 넘어요.”
강하나는 그의 눈빛이 불편했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대충 핑곗거리를 댔다.
“지금은 그럴 기분 아니야.”
이정인은 그 말에 아차 싶었는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으로 들어온 후 강하나는 바로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고 물을 맞았다. 그러고는 드디어 마음 놓고 눈물을 흘렸다.
아무리 괜찮은 척해도 그녀 역시 여자였기에 사랑했던 남자의 배신과 한순간에 깨져버린 3년간의 혼인을 눈앞에 두고 마냥 평온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저 추악한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사실 강하나는 박지헌과 서다은이 서로를 애정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고 함께 달콤한 스킨십을 하고 있다는 것만 생각하면 손이 덜덜 떨리고 심장이 날카로운 칼끝으로 몇 번이나 찔린 것처럼 아프고 또 괴로웠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에게 괴로움을 털어낼 수 있는 시간은, 눈물을 마음껏 흘릴 수 있는 시간은 뜨거운 물줄기를 온몸으로 맞고 있는 순간밖에 없다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아주 미세한 감정도 드러내지 말라며 되뇌었다.
6살이 된 해에 그녀의 어머니가 집에서 쫓겨나면서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너는 이제 엄마가 없이 살아야 하니 절대 사람들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으니까.
맞는 말이었다.
감정은 드러낼수록 약점이 되고 약점은 결국 배신을 낳으니까.
샤워를 마치고 나온 강하나의 표정은 언제 울었냐는 듯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감독님, 박지헌 대표로부터 전화가 몇 통이나 왔어요...”
이정인의 말에 미니 냉장고의 손잡이를 잡아당기던 강하나의 손이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냉장고 문을 벌컥 열고 안에서 시원한 물을 꺼냈다.
그러고는 마침 또다시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 이제야 받으면 어떡해? 그리고 전원은 왜 꺼놨어? 집은 왜 안 돌아갔고?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이정인은 눈치껏 멀리 떨어졌다. 하지만 신경은 온통 그쪽에 집중하고 있었다.
강하나는 박지헌의 목소리에 간신히 진정했던 마음이 또다시 소용돌이치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휴대폰을 꽉 쥐더니 차분한 목소리를 유지하며 되물었다.
“지헌 씨도 집으로 안 돌아갔잖아.”
만약 박지헌이 집으로 돌아갔으면 침실이 텅 비어 있는 걸 발견했을 것이고 그녀가 남긴 편지도 읽어봤을 것이며 그러면 이렇게 쓸데없는 얘기를 하려고 들지 않았을 것이다.
“맞아. 나도 집으로 안 돌아갔어. 그런데 그건 야근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잖아. 그럼 차라리 이렇게 하자. 앞으로는 회사 일을 전부 다 집에서 처리할게. 네 바로 옆에서 일할게. 이러면 다른 오해 같은 건 생기지 않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이제 말해봐. 지금 어딘지. 데리러 갈게.”
다급한 그의 목소리에 강하나의 마음이 흔들렸다.
“나 지금...”
“지헌 씨, 아직도 멀었어요?”
그런데 마음이 약해져 그와 한번 제대로 얘기해보려고 마음먹은 그때 전화기 너머에서 갑자기 서다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게 된 순간 강하나의 몸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하, 나와 통화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서다은이랑 같이 있는 거야? 박지헌, 넌 대체 날 뭐로 생각하는 거야...? 그래, 이런 사람이니까 그간 나를 그렇게도 감쪽같이 속여왔지.’
강하나는 눈을 질끈 감고 이를 꽉 깨물더니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박지헌이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왔지만 그녀는 아예 전원을 꺼버렸다.
...
다음 날 아침.
박지헌은 아침 일찍 서다은과 함께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야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마당에 힘없이 쓰러져 있는 나무를 보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내가 분명히 이거 다시 원위치시키라고 했을 텐데요?”
그러자 유 집사가 난감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게... 전문가를 불러 다시 심을 수 있는지 물어봤는데 뽑는 와중에 뿌리가 상해버려 다시 심는다고 해도 일주일도 안가 금방 시들해져 말라죽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강하나, 이게 다 너 때문이야! 그러게 왜 쓸데없이 나무를 뽑으라고 시켜서는, 쯧!’
박지헌은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나무의 이파리를 매만졌다.
“다른 전문가한테도 자문해보세요.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나무를 살리세요.”
유 집사는 그 말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하나는... 정말 안 돌아왔습니까?”
“네...”
박지헌은 그 말에 눈을 한번 질끈 감더니 이내 성큼성큼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다 벽에 다시금 걸린 웨딩 사진을 보고는 그제야 굳었던 얼굴을 폈다.
“지금 당장 하나한테 전화해서 집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빨리 오라고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