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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이정인은 원래 오늘 저녁 강하나와 함께 일면식이 있는 투자자들과 식사를 하려고 했지만 의도치 않게 박지헌과 그녀 사이 일을 듣게 되고는 과감히 식사 자리를 취소했다. 강하나는 지금 술보다는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공항에서 만나서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상당히 피곤해 보였고 새벽에는 눈물까지 흘렸으니까. 그런 그녀를 식사 자리로 데리고 나가는 건 못 할 짓이었다. 그래서 이정인은 강하나와 별장 안에서 간단히 식사한 후 그녀의 방에 수면에 도움 되는 향초를 켜주었다. “고마워. 이건 언제 사 온 거야?” “아까 잠깐 나갔다가 예뻐서 샀어요.” 강하나는 이정인이 켜둔 향초 때문인지 간만에 잠을 아주 푹 잤다. ... 운성 빌라. 서다은은 박지헌의 어깨에 찰싹 기대 그와 함께 영화를 시청했다. 그런데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녀와 달리 박지헌은 통 영화에 집중하지 못했고 1분에 한 번꼴로 휴대폰까지 쳐다보았다. 이에 집중하고 있던 서다은도 어느새 영화보다는 그의 움직임에 더 신경을 쏟게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녀는 애써 화를 꾹꾹 눌러 담으며 그를 불렀다. “지헌 씨.” 그러고는 두 팔로 박지헌의 목을 살포시 끌어안았다. “응, 왜?” 박지헌은 대답하면서도 여전히 시선은 휴대폰에 고정하고 있었다. 더 정확히는 강하나의 SNS 프로필과 그녀가 올린 여러 사진에 말이다. 강하나는 그의 메시지에 아직도 아무런 답장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박지헌은 지금 상당히 머리가 복잡해져 있는 상태고 심지어는 초조하기도 했다. 강하나가 이렇게까지 화를 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녀가 제일 마지막으로 그에게 화를 낸 건 그가 해외 도박장에서 도박하다가 140억이나 잃었을 때였다. 당시 그 사실을 알게 된 강하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그의 뺨을 때린 건 물론이고 무릎을 꿇게 하고 두 번 다시 도박 안 하겠다는 맹세를 하게 한 것에 더해 장장 3일이나 그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그러다 4일째 되는 날에야 드디어 그를 용서해주었다. 그래서 박지헌은 솔직히 조금 겁이 났다. 이번에는 3일보다 더 오래 걸릴까 봐. ‘하나와 기 싸움을 하려고 드는 게 아니었어. 아무리 화를 내도 애정에서 비롯된 것일 텐데 차라리 내가 머리를 숙이고 달래주는 게 나았어. 하지만...’ 하지만 강하나가 두 사람이 힘들게 키운 나무를 뽑아버린 것과 그가 어렵게 구해다 준 물건들을 전부 다 팔아버린 걸 생각하면 화가 절로 나 도저히 숙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서다은은 자신의 애교에도 심드렁한 그의 태도에 결국 화를 내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지헌 씨, 아까부터 왜 자꾸 휴대폰만 보는 거예요? 그게 나보다 더 소중해요? 전에 나랑 약속했잖아요. 나랑 있을 때는 내 생각만 하겠다고, 그 여자 생각은 안 하겠다고!” 그 말에 박지헌이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서다은은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흠칫하더니 이내 다시 얌전히 소파에 앉았다. 박지헌은 항상 이렇게 심기가 불편하거나 대답하고 싶지 않으면 눈빛으로 그녀를 제압하고는 했다. 강하나에게는 절대 그러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서다은은 이정 그룹에 들어간 뒤로 오래전부터 그와 알고 지낸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턴가 그를 ‘오빠’가 아닌 ‘지헌 씨’라고 불렀다. 그래야 두 사람의 관계에서 조금은 동등해질 것 같아서. “맨날 나한테만 무섭게 해. 그 여자랑 있을 때는 안 그러면서.” 박지헌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 앞에서 그 여자 얘기 꺼내지 말라고 했지? 그리고 쓸데없는 질투도 하지 말라고도 했고. 대체 뭐가 문제야? 네가 강하나 기를 꺾어주고 싶다고 해서 요즘은 계속 강하나 바람맞히고 너랑만 있었잖아. 그런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뭐가 불만이냐고? 그 여자가 당신 와이프인 게 마음에 안 드니까 그러지!’ 서다은은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사실 그녀가 원하는 건 언제나 박지헌의 아내 자리뿐이었다. 아무리 잘나가는 연예인이라도 결국에는 일을 해야만 돈을 벌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박지헌의 아내가 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손쉽게 돈을 벌 수 있게 된다. 그런 좋은 자리가 있는데 어떻게 탐을 내지 않을 수 있을까. “질투한 거 아니에요. 그냥 나한테 집중 좀 해달라고 그러는 거예요. 이렇게 정신을 다른 곳에 팔고 있으면 여기까지 나 보러 온 이유가 없잖아요.” 박지헌은 그 말에 눈빛이 복잡해지더니 이내 다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달랬다. “알겠어. 휴대폰은 이제 멀리 치워버릴게. 그러니까 용서해줘, 응?” ... 강하나는 몸을 따뜻하게 감싸는 햇볕에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윗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쭉 켠 다음 눈을 비비적거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에는 한 남자가 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강하나는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 전원을 켰다가 이번에도 가득 날아든 박지헌의 메시지에 짧게 한숨을 쉬었다. 계속 이렇게 말을 보내오는 걸 보니 그 뒤로도 계속 두 사람의 침실로 돌아가지는 않은 건 확실한 듯했다. 그때 휴대폰이 울리고 박지헌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강하나는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자기야, 나 자기 때문에 피가 다 마르려고 해. 내가 잘못했어. 더 이상 큰소리 내지도 않고 앞으로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할게. 그러니까 제발 어디 있는지 얘기해줘. 나 지금 자기 얼굴 당장 보고 싶단 말이야.” 박지헌의 목소리는 다정하기 그지없었고 애교도 살짝 섞여 있었다. 한때는 화가 나도 바로 풀렸던 말투였는데 지금은 그저 눈살이 찌푸려지기만 했다. “지헌 씨, 이런 말 할 시간 있으면 빨리 집으로 가봐. 그러면 내가 왜 이러는지 알게 될 거야.” “자기 물건 하나 없는 방에 나 혼자 돌아가서 뭐해? 자기 설마 내가 자기 없는 방에서 혼자 괴로워하기를 바라는 거야? 휴, 알았어. 그게 자기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야지. 지금 바로 집으로 갈게. 전화 끊지 마. 나 도착할 때까지 제발 끊지 마! 숨소리만이라도 듣게 해줘.” 박지헌의 말투는 꼭 괜히 투정 부리는 아내를 상대하는 말투 같았다. “자기야, 내가 전에 말했지?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만 사랑하고 또 자기만 아껴주겠다고. 난 한번 내뱉은 말은 꼭 지켜.” 그는 정말 입만 살았다는 표현이 딱 맞는 남자였다. 어쩜 이렇게 뻔뻔하게 입을 놀릴 수 있을까. 강하나는 모든 게 지겹다는 얼굴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착했어?” “응, 방금 도착했어.” 박지헌은 차 키를 아무렇게나 도우미에게 던진 후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두 사람이 함께 꼭 붙어 자던 침대 위에 앉았다. “이제 말해. 날 어떻게 벌할 생각이야? 자기 기분이 풀릴 수만 있다면 난 뭐든 할 수 있어.” 강하나는 그 말에 눈을 살포시 감았다. ‘이렇게도 사람이 둔할 줄이야. 아니면 자신감이 지나치게 넘쳐서 그런가?’ 박지헌은 방 안으로 들어왔는데도 여전히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했다. “밸런타인데이 때 내가 줬던 선물 상자 기억해?” “당연하지.” 박지헌은 그 말에 침대 협탁을 열어 선물 상자를 꺼냈다. “그때 나한테 3일 뒤에 열어보라고 했잖아. 혹시 자기가 나한테 하고 싶었던 말이 이 선물 상자를 확인하라는 거였어? 그럼 우리 같이 열어볼까? 내가 지금 자기 쪽으로 갈까?” “아니. 그냥 혼자 열어.” 단호한 강하나의 말에 박지헌이 풀이 죽은 말투로 대답했다. “알겠어.” 강하나가 준비한 선물 상자는 빨간색 리본까지 달려 있어 무척이나 예뻤다. 그런데 박지헌은 지금 그런 것에 시선을 빼앗길 여력이 없었기에 급하게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열었다.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 든 건 벨트나 커프스단추 같은 액세서리가 아닌 종이 한 장뿐이었다. 그는 혹시 다른 게 뭐가 더 있나 싶어 상자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종이밖에 없었다. ‘이건 또 무슨 뜻이지?’ “자기야, 밸런타인데이 선물치고는 좀 특이한데 정말 종이 한 장이 다야? 아, 알겠다. 이거 자기가 쓴 러브레터구나? 그치?” 강하나는 그의 긍정적인 사고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럴지도 모르지.” 박지헌은 그녀의 대답에 괜히 마음이 설레 상자를 옆으로 던져버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종이를 뒤집었다. 그런데 그의 눈앞에 보이는 건 [이혼합의서]라고 대문짝만하게 찍힌 다섯 글자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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