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고인성의 말 한마디가 송유리를 일단 위기에서 구해줬다. 덕분에 그녀는 멍하니 룸 한가운데에 서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송유리는 서둘러 고인성의 옆자리에 앉았다.
고인성이 따로 시킨 건 없었지만, 그녀는 상황 파악이 빠른 편이었다.
주변을 재빨리 살피더니 가장 비싼 술을 찾아 고인성의 빈 잔에 채워 넣었다.
사실 그들이 룸에 도착한 지 시간이 꽤 지났을 텐데, 고인성의 잔이 여태 비어있다는 것도 의외였다.
그것도 다 마셔서 빈 게 아니라, 잔 벽면에는 술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깨끗한 빈 잔이었다.
송유리가 잔을 채우자, 고인성은 마치 그녀에게 큰 호의를 베푸는 듯 자연스럽게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을 본 윤지훈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것 봐. 유리 씨가 따라준 게 아니면 입에도 안 댔다니까. 진짜 유리 씨가 특별한가 봐. 혹시 유리 씨가 따른 술이 더 맛있기라도 해?”
그런 생각이 들자, 윤지훈은 참지 못하고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럼 나도 한 잔 따라줄래?”
이런 부탁이라면 서비스 직인 송유리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고인성이 먼저 나섰다.
“신경 쓰지 마.”
“...”
송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순간 어색해졌다.
‘윤지훈도 중요한 손님인데, 그를 무시해도 괜찮을까?’
다행히 윤지훈은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유리 씨 인성이 형만 잘 챙기면 돼. 우리 같은 찌꺼기들은 알아서 잘 따라 마실 테니 신경 쓰지 마.”
말투는 어딘가 빈정거리는 느낌이었지만, 실제로는 악의가 담긴 건 아니었다.
“근데 그 여자는 참 재수가 없네. 할 일도 많을 텐데, 왜 굳이 그런 얕은수를 쓰다 걸려서... 아마 앞으로 비트 타운에서 일할 생각은 접어야 하지 않을까? 인성이 형한테 찍힌 여자를 누가 쓰겠어. 결국에는 작은 공장 같은 데 취직해서 하루살이처럼 연명하겠지.”
송유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고인성을 건드리면 끝장이구나. 앞으로는 더 조심해야 해.’
다시 방 안은 밝고 편안한 분위기로 돌아갔다.
고인성과 송유리 쪽의 분위기 또한 한결같이 차분하고 조용했다. 그러던 중 고인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송유리 씨?”
“네.”
송유리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여자한테서 뭘 얻어먹은 건 처음이었어.”
“네?”
송유리는 고개를 떨구었다. 자연스럽게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하지만 고인성이 그 여자가 자신이라는 걸 알아챘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에 사준 야식... 정말 고마웠어.”
“네?”
송유리는 순간 긴장했지만, 최대한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작은 손으로 술병을 더욱 세게 움켜쥔 동작은 그녀의 심리를 드러내고 말았다.
고인성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그날 나랑 같이 야식 먹은 사람, 유리 씨 맞잖아. 분명 방금 본 사이인데, 돌아서자마자 모르는 척이라... 연기 실력 꽤 좋은데?”
송유리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알아챘을까? 비트 타운에서는 항상 마스크를 썼고, 단 한 번도 벗은 적이 없었는데...’
고인성은 그녀의 의문을 읽은 듯 다시 말했다.
“지난번에 별장에 왔을 때, 그 여자가 네 이름을 부르는 걸 들었거든.”
‘이진 언니가 내 이름을 불렀던 걸 들은 거야? 이름 때문에 들킨 거였어...’
이제 와서 계속 모른 척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송유리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저는 그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근무 중에는 직업의식을 지켜야 하니까, 손님과 사적으로 친해지려는 생각을 해선 안 됐어요.”
고인성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직업의식이 투철하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날 그들은 비트 타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었다.
송유리가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입을 닫았을 뿐’이었다.
“그러네. 내가 오해했군.”
고인성은 그녀의 입장에서 맞춰주며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사실 송유리는 혹시라도 진실이 들통나면 고인성이 기분 나빠할까 봐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이미 손서우 같은 전례가 있었으니 말이다. 만약 이 직장을 잃으면 정말 길거리에 나앉을 판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고인성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고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마치 무언가 즐거운 일이 생긴 것처럼...
‘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 거지? 정말 좋은 일이 있긴 한 건가?’
송유리는 무심결에 물었다.
“어떻게 손서우 씨가 제가 아니란 걸 알아채셨어요?”
“직감적으로?”
“...”
‘직감이라니. 고인성의 직감이 그렇게 대단했다면, 함께 하룻밤을 보낸 그 사람이 나라는 걸 몰랐을 리가 없잖아. 완전 허세야! 허세!’
송유리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괜히 호기심을 드러내는 것보다, 차라리 고인성에게 더 비싼 술을 따라주고 보너스를 받는 게 현실적이었다.
...
손서우는 비트 타운에서 쫓겨난 후 참담한 꼴로 서 있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화려한 로비를 바라보며 그녀의 마음은 억울함으로 타올랐다.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돈을 받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남자 친구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황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손서우는 다짜고짜 말했다.
“내일까지 내 계좌에 4억 원이 입금되어 있어야 해. 만약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난 진실을 고 대표님께 말할 거야. 나는 말한 건 지키는 사람이니까.”
“너 미쳤어? 4억 원이 그렇게 쉽게 나오는 줄 알아?”
“그건 네가 알아서 해. 어차피 난 이미 고 대표님께 찍혔어. 이제 와서 잃을 게 뭐가 있겠어? 하지만 너는 다르잖아. 부잣집 사모님으로 산 지 얼마나 됐다고 당장 모든 걸 다 잃고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겠어?”
“너!”
황이진은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지금 손서우를 자극해 봐야 득 될 게 없었다.
“알았어. 최대한 빨리 준비할게.”
“참, 한 가지 더. 너 진짜 정신 똑바로 차려. 네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스폰서를 송유리한테 빼앗기면 어쩌려고 그래? 송유리는 겉으로는 순진한 척하지만 수작 부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더라.”
손서우는 황이진을 자극하고 싶었다. 친구끼리 서로 물어뜯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황이진은 뜻밖에도 냉소적으로 응수했다.
“네가 무능력하니까 질투하는 거지. 너야말로 폐기 처분급 하남자를 남자 친구랍시고 붙잡고 잘 살길 바란다.”
“황이진, 너 진짜 내가 당장 대표님께 가서 진실을 말하면 어쩌려고 그래? 내가 못 할 것 같아?”
“돈이 필요하면 입 다물어.”
손서우는 황이진이 이렇게까지 단호할 줄은 몰랐다.
물론 그녀에게도 돈이 절실했다. 그래서 화가 나면서도 진짜 진실을 고인성에게 말할 용기는 없었다.
그건 손서우가 가진 마지막 카드였기에, 결국 헛웃음을 지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네 스폰서가 송유리한테 넘어가고 나서 네가 어떻게 반응할지 두고 볼게.”
...
오늘도 송유리는 40만 원의 팁과 200만 원에 가까운 보너스를 받았다.
‘매일 이렇게 벌 수 있다면 진작에 부자가 됐을 거야... 서빙 일이 이렇게 수익성이 좋은 줄은 몰랐네!’
매니저는 그녀에게 보너스를 건네며 농담을 던졌다.
“너 이쪽 일에 재능 있는 거 같은데? 앞으로 쭉 내 밑에서 일해보는 건 어때?”
매니저는 송유리가 고인성 같은 까다로운 손님을 단번에 사로잡은 것도 모자라, 아예 ‘그녀가 아니면 안 된다’는 분위기까지 만든 것을 보고 손서우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송유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매니저님, 저는 그냥 아르바이트생이에요. 학교로 돌아가면 더 이상 일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
“지금처럼 하루에 몇십만 원을 벌 수 있는데, 대학교를 나와도 이보다 더 벌 수 있을 것 같아?”
“그래도 저는 학업을 마치고 싶어요.”
“하아... 정말 아깝네.”
매니저는 한숨을 쉬며 떠났고 더 이상 말리지는 않았다.
송유리는 물건을 정리하고 나가려던 찰나, 황이진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오늘도 고 대표님 홀려서 용돈 좀 받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