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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내가 가당치 않은 거지

그녀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훤칠한 체구의 남자가 문 앞에 드리운 햇살을 가로막으며 대뜸 입을 열었다. “하윤아.” 그 남자는 고귀한 자태에 한없이 어두운 눈동자로 예리하게 이하윤을 노려봤다. 얇은 입술은 꾹 다물고 있었고 왠지 모르게 선뜻 다가설 수 없는 아우라를 내뿜었다. 강찬우를 본 이하윤은 눈가에 놀란 기색이 역력하더니 곧바로 애교를 부렸다. “찬우 씨도 올 줄 알았어요. 역시 날 홀로 내버려 둘 리는 없죠.” 성시연은 묵묵히 한숨을 내쉬고 이제 곧 입을 열려고 하는데 강찬우가 글쎄 이하윤을 데리고 홱 나가버리는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예 성시연에게 눈길 한번 안 줬다. 그녀는 결국 입가에 다다른 말을 꾹 집어삼키고 멀어져가는 ‘한 쌍의 커플’을 넌지시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이런 저 자신이 우스웠다. 강찬우의 옆에는 어떠한 여자도 다 잘 어울리지만 유독 그녀만 가당치가 않았다. 헤아릴 수 없이 관계를 가졌어도 강찬우에게 성시연이란 영원히 남 보여주기 부끄러운 하찮은 존재였다.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강찬우가 대뜸 이하윤의 손목을 뿌리치고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하윤은 어리둥절한 채 잠시 머뭇거리다가 용기 내어 풍만한 가슴을 그의 팔에 비벼댔다. “찬우 씨... 왜요?” 강찬우는 고개를 살짝 돌리고 싸늘한 눈빛으로 주제 파악 못하는 그녀를 쳐다봤다. “난 남들이 놀다 버린 여자는 쳐다도 안 봐. 특히 내 친구들이 놀다 버린 여자는 더 어림없고.” 이하윤은 멍하니 넋 놓고 말았다. 방금 애틋한 제스처를 거부하지 않길래 둘 사이가 더 깊게 발전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이 남자가 다짜고짜 태도가 변할 줄이야.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강찬우는 안으로 들어가며 그녀가 문질렀던 옷소매를 툭툭 털었다. 또한 두 눈에는 혐오로 가득 차 있었다. 이하윤은 미처 따라서 들어가지 못했다. 방금 그의 눈빛에 덜컥 겁먹은 그녀는 사색이 된 채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하윤과 같은 ‘재벌가의 장난감’은 당연히 강찬우의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방금 그의 ‘묵인’이 착각을 심어줬을 뿐, 그녀는 제 분수를 잘 알고 있다. 저녁에 성시연은 안 그래도 집에 돌아갈 생각이 없었는데 마침 동료가 교대 근무를 바꿔 달라고 하니 선뜻 동의했다. 오늘 밤엔 집에 못 돌아갈 터라 강찬우에게 밥을 제때 챙겨 먹으라고 당부하려던 참인데 휴대폰을 꺼낸 순간 망설이게 됐다. 이전에도 항상 성시연이 꼼꼼하게 챙겨주며 그에게 들이댔었는데 대체 언제쯤 이 비겁한 습관을 고칠 수 있을까? 이미 단념하기로 했고 무려 3년이란 시간을 공들여 이곳을 떠나겠다고 마음먹었으니 강찬우가 갑자기 돌아왔다고 마음이 흔들리면 안 된다. 그녀는 여전히 강찬우를 볼 때마다 마음이 설레지만 절대 또다시 비굴하게 저 자신을 깎아내릴 순 없다. 애초에 그녀가 일편단심으로 강찬우를 좋아했으니 이젠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한밤중에 응급수술이 들어와 밤새 바삐 돌아쳤고 아침 여섯 시가 다 돼서야 마무리했다. 수술실에서 나오자 날이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성시연은 너무 지친 나머지 허리를 곧게 펼 수 없었고 정말 오버가 아니라 수술실에서 나온 순간 모든 사물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수술을 하려면 긴 시간 동안 고도로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이건 결코 체력 노동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사람 목숨이 날아갈 일이니까. 사무실에 돌아와 좀 더 휴식한 후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집으로 돌아갔다. 안개 속에 늠름하게 비치는 강씨 저택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문득 감개무량해졌다. 한때 이곳을 집이라고 여겼고 그 안에는 그녀가 제일 사랑하지만 가질 수 없는 그 남자가 살고 있다. 그녀 홀로 허황한 망상에 빠져 수년 동안 그 남자를 마음에 품고 있었을 따름이다. 성시연은 올해 24살이고 강찬우는 그녀보다 세 살 더 많다. 남자는 서른쯤에 슬슬 자리가 잡혀간다고 하는데 강찬우는 돈도 많고 능력도 좋은 데다가 출중한 외모까지 지녀 결혼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이 몇 년 동안 그녀는 드디어 먼저 물러서는 법을 배웠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밤새 지친 그녀는 익숙한 그 집에 들어가 침대에 털썩 눕더니 스르륵 잠들었다. 마음 같아선 신발도 대충 벗어 던지고 가방을 소파에 버린 채 방에 돌아가 꿀잠을 자고 싶었지만 강찬우가 집안이 어수선한 걸 싫어한다는 생각이 번쩍 떠올라 귀찮은 마음을 뒤로하고 신발을 가지런하게 정리해놓았다. 한편 집에 들어와서부터 강찬우는 계단 입구에서 줄곧 그녀를 살펴보고 있었다. 너무 졸려 눈이 풀린 그녀는 몸을 돌리더니 대뜸 강찬우의 가슴팍에 부딪혔다. 강찬우는 미간을 찌푸리고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며 마디가 선명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목을 확 잡더니 차갑게 쏘아붙였다. “똑바로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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