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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김인영은 전화를 끊은 뒤에 장명수를 바라보았다. 장명수는 통화 중에 상황을 알아차리고 먼저 입을 열었다. “이장훈을 혼내주고 싶은 거지? 그건 나한테 맡겨. 안 그래도 나도 그놈 마음에 들지 않았어.” “사실 이런 건 다 사소한 문제고 지금 중요한 건 태진그룹과의 협력이야. 내가 그 회사에 아는 친구가 한 명 있는데 내일 같이 한번 만나보자.” 김인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애정이 담긴 눈빛으로 장명수를 바라보았다. 장명수는 그녀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해결해 주는 스타일이었다. 게다가 인맥도 넓어서 태진그룹에까지 인맥이 뻗어 있었다. 이는 이장훈은 영원히 해주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이장훈과 이혼하고 장명수를 만난 게 참 옳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다음 날. 이장훈은 예령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뒤에 태진그룹으로 향했다. 외출하기 전, 어머니는 무조건 남자가 먼저 다가가야 하야 한다며 신신당부를 했다. 그는 그러겠노라고 고개는 끄덕였지만 그건 단지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함이었다. 이장훈은 먼저 다가가는 성격도 아니고 이미 김인영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은 상황에서 또 한 여자에게 마음을 열 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었다. 그는 조수연과의 만남에서 굳이 자신을 낮추고 여자를 떠받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결혼은 인연이 닿으면 하는 거고 그게 아니라면 어쩔 수 없었다. 태진그룹 대표 사무실. 아침 일찍 출근한 조수연의 표정도 별로 좋지 않았다. “은정아, 어떡하지? 이장훈 그 사람 딱 보니까 변태더라. 처음 보는 여자 단추를 푸는 남자가 어디 있어? 할아버지는 더 만나보라고 회사에까지 출근을 시켰는데 난 그 사람과 더 만남을 이어가고 싶지 않아. 하지만 우리가 그 사람한테 원하는 게 있으니 쫓아버릴 수도 없고.” 유은정은 조수연의 비서이자 그녀의 절친한 친구였다. “일단 참아. 만약 또 그런 무례한 짓을 저지르면 네가 뭐라고 하기 전에 내가 쫓아버릴 거야.” 말을 마친 유은정은 앙증맞은 주먹을 휘두르며 윙크를 날렸다. 조수연은 그 모습을 보고 조금은 기분이 풀려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무슨 일을 시켜야 할까?” 유은정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린 제약 회사고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을 것 같은데? 운전기사를 시켜보는 건 어때?” 그러자 조수연이 표정을 확 일그러뜨렸다. “난 그런 사람이랑 같은 차 타고 싶지 않아. 그러다가 갑자기 본성을 드러내면 어떡해?” 그러자 유은정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너 모태솔로잖아. 이 기회에 스킨십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조수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뭐라는 거야?” 유은정이 웃으며 말했다. “사실 너도 말은 그렇게 해도 외롭잖아.” 조수연은 억울함에 이를 갈았다. “그건 너겠지. 나한테 뒤집어씌우지 마.” 유은정은 친구가 진심으로 화낼 것 같아 목을 움츠리며 고개를 저었다. “장난이야. 일단 일 얘기부터 하자. 난 여전히 이장훈 씨는 운전기사가 어울린다고 봐. 네가 원하면 그 사람이랑 같은 차 타고 이동하고 원하지 않으면 다른 차 타고 이동하면 되잖아.” 조수연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하자.” 그 시각 이장훈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대표 사무실로 직행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조수연은 한창 고개를 숙이고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깔끔한 정장에 옅은 화장을 하고 머리를 하나로 묶은 그녀의 모습은 지적인 아름다움이 넘쳐났다. 한참을 서 있었지만 그는 뭐라고 인사를 건네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조수연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이장훈을 발견하고 얼굴이 차게 식었다. “왔어요?” 이장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수연의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오늘 정말 예쁘네요.” 사실 그는 여자는 많이 띄워줘야 한다는 어머니의 지시를 따른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조수연의 표정은 더 차게 식었다. “그래요.” 이장훈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가슴 근처의 세 번째 단추로 눈길이 갔다. 조수연은 역시 이 사람은 변태구나 하고 생각하며 발끈했다. “어딜 보는 거예요!” 사실 이장훈은 지난번에 크게 데인 것에 긴장해서 확인 차 쳐다본 것뿐이었다. 하필이면 오늘도 조수연은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어마어마한 사이즈 때문에 단추가 터질 것 같았다. “그냥 그쪽을 위해서 하는 말인데, 타이트한 셔츠는 안 입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쪽이랑 잘… 안 어울려요.” 조수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이장훈은 자신이 또 오해를 샀다는 것을 알고 얼른 화제를 돌렸다. “내가 여기로 온 건 조수연 씨라는 사람에 대해 더 알아보기 위해 온 거예요.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으니 적당한 일자리나 소개해 줘요.” 조수연이 이를 갈며 말했다. “내 개인 운전기사나 해요. 여기 차키요.” 말을 마친 그녀는 반짝이는 차키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장훈은 차키를 받아들고는 담담히 물었다. “차는 어디 있죠?” 조수연은 그가 순순히 차키를 받아든 모습을 보고 의외라는 생각을 하며 싸늘하게 말했다. “지하 1층 주차장이요. 용건 끝났으면 그쪽으로 가보세요.” 그녀는 마치 벌레 쫓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이장훈은 문고리를 잡고 재차 강조해서 말했다. “정말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사이즈 큰 사람은 셔츠가 안 어울려요.” “아니 이 사람이!” 조수연은 화가 나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유은정이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무슨 얘기를 나눴길래 이렇게 화가 나 있어?” 조수연이 씩씩거리며 답했다. “그 변태가 글쎄… 내가 사이즈 크다고 셔츠가 안 어울린다잖아.” 유은정은 그녀의 가슴께를 훑어보고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어째 더 커진 것 같다? 대체 뭘 먹으면 너처럼 되는 거야?” 조수연은 그런 친구를 곱지 않게 흘겼다. “장난 칠 거면 나가!” 유은정은 생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나갈게.” 말을 마친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한편,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이장훈이 차키 버튼을 누르자 핑크색 승용차에서 불이 들어왔다. 핑크색? 이장훈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남자가 운전하기에는 너무 안 어울리는 색상이었다. 그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잠긴 사이, 차량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와 핑크색 차 옆에 주차했다. 문이 열리고 차에서 내린 김인영은 이장훈을 알아보고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당신이 여기 왜 있어?” 이장훈은 말없이 싸늘한 시선으로 김인영을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이혼한 마당에 더 엮이고 싶지도 않고 가능하다면 다시는 안 보고 싶었다. 김인영은 동생이 맞은 일이 떠올라서 기분 나쁜 말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장훈, 당신 예전에는 그래도 남자다웠어. 적어도 사람에게 폭력을 쓰지는 않았다고. 이혼하자마자 본색을 드러낼 줄은 몰랐어. 아무리 이혼이 하기 싫어도 그렇지 어떻게 유신이한테 화풀이할 수 있어?” 화풀이? 이장훈의 두 눈이 차게 식었다. “뭔가 오해를 하고 있나 본데 김유신은 맞을만해서 맞은 거야. 지금 보니까 너무 약하게 때린 것 같네.” 김인영은 너무도 낯선 이장훈의 모습에 분노가 치밀었다. “당신한테 정말 실망이야! 아무리 화가 나도 내 동생은 건드리면 안 됐어. 유신이가 좀 예의가 없어도 그래도 내 동생이잖아!” 이장훈은 들을수록 짜증이 치밀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김유신이 집에 와서 난동을 부려서 부모님이 폭삭 늙은 걸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에 분노가 끓어올랐다. 다른 일이면 몰라도 이건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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