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사장님, 제가 식당 예약할까요?” 성 비서는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물었다.
나영재는 언짢은 듯 이마를 만지다가 “필요없어.”라고 말했다.
안소희가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서란 걸 알고 있었기에, 돈을 쓰면서 그녀의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진다면 그냥 쓰게 놔둬야겠다고 생각했다.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휴대폰에 또 하나의 결제 메시지가 날아왔는데, 그 결제 금액이 무려 60억이였다.
성 비서와 4명의 보디가드는 서로 눈만 멀뚱멀뚱 쳐다볼 뿐 차마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짐꾼처럼 묵묵히 짐만 들었다.
안소희는 물건만 사고 바로 나왔고, 보석들은 당연히 빈 손으로 서있던 성 비서가 들게 되었다. 쇼핑을 계속 이어가려던 찰나, 나영재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짜증났던 기분이 발신인의 이름을 본 순간 조금이나마 좋아졌고, 찡그렸던 이마가 펴졌으며, 마디가 분명한 손가락으로 휴대폰을 눌러 유달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가윤아.”
성 비서: “......”
4명의 보디가드: “......”
사장님! 설마 사모님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까먹으신 건 아니시죠?!
“나 사장님, 가윤 씨가 병원으로 재검하러 가는 길에 차사고가 났어요. 지금 아직 수술실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전화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볼륨이 좀 높았고 아주 급한 듯 했다. “혹시 여기로 와주실 수 있나요? 수술실 들어가기 전에 계속 사장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어요.”
“주소 보내. 당장 갈게.” 나영재는 심장이 덜컹하는 느낌이 들었고, 바로 답을 줬다.
전화를 끊고,
그의 시선은 안소희에게 멈췄다. 뭔가를 설명할려고 했으나 또 그럴 필요가 없는 듯 하여, 그냥 성 비서에게 “소희랑 같이 쇼핑하면서 사고 싶어하는 건 다 사게 해. 다 들고 갈 수 없으면 오후에 집으로 가져다 달라고 하고.”라고 분부했다.
보디가드들: “네, 사장님.”
나영재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떠나갔고,
안소희와 성 비서, 보디가드들은 그 자리에 남겨졌다.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졌고,
성 비서는 본인이 무슨 말이라도 해서, 사장님의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회복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금색 안경테를 위로 올리더니 얼굴에 특유의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사모님, 걱정하지 마세요. 사장님이 일을 마치면 바로 돌아오실거에요.”
“고생이 많네요.” 안소희는 의미심장하게 한마디 했다.
성 비서: “?”
뭔 소리지?
안소희는 밝고 화려하게 인테리어가 된 쇼핑몰을 보면서 천천히 말했다. “밤낮없이 힘들게 일하는 것도 모자라, 양심을 어기면서까지 이런 말들을 해야 하니깐요. 애인이랑 데이트하러 간 사람이 중간에 다시 돌아올 리가 있나요?”
성 비서:“......”
보디가드들: "......"
순간,
그녀를 바라보는 5인의 눈에는 연민이 있는 듯 했다.
이게 아마 부잣집 사모님의 비애인가? 분명 남편이 다른 여자와 함께 있다는 걸 알면서도 화조차 낼 수 없다니.
참.
“그렇게 불쌍한 눈빛으로 절 바라보지 마세요.” 안소희는 그들의 반응을 보면서 재밌다는 느낌이 들어 아주 현실적으로 말했다. “지금 당신들 손에 들려있는 물건들 중에서 아무거나 하나 꺼내도 최소 당신들 1년에서 10년 월급이에요.”
헉!
치명적인 타격.
너무 정곡을 찌른다!
“뭐 갖고 싶은거 있어요?” 안소희가 물었다.
다섯 명이 일제히 눈길을 돌려 안소희를 바라보았고,
이마에는 물음표가 줄줄이 있는 것 같았다.
도저히 사모님의 엉뚱한 생각을 미처 따라갈 수가 없다.
“그 사람이 자기 애인을 만나러 갔으니, 제가 그 사람 돈으로 당신들께 뭘 좀 사줄게요.” 안소희는 카드를 손에 잡고 있었고, 말투는 전보다 좀 깊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아직도 나영재가 첫사랑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갔다는 것에 대해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지금의 안소희는 단지 그의 카드를 한도 끝까지 다 긁어버리고 싶을 뿐이다.
성 비서: "!"
보디가드들: "!"
그들 다섯은 놀란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소희는 그런 그들이 참 재밌다고 느껴졌고, 계속 카드를 긁으며 끊임없이 사재기했다.
병원에서 계속 첫사랑과 함께 있을 줄 알았던 나영재는 , 그들이 식사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나타났고, 주변에는 냉랭한 한기를 풍기고 있었으며, 눈빛은 마치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모든 사람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안소희를 주차장까지 끌고 갔고, 그녀를 잡고 있는 손에는 놀랄만큼 큰 힘이 들어가 있었다.
“펑!”
안소희는 나영재에 의해 차 문에 밀쳐져 넘어졌다.
몸의 통증이 느껴지자, 무의식적으로 이마가 찌푸려졌다.
뭐 폭탄이라도 먹은건가?
안소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를 질책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왜 가윤이를 해치려고 했어?” 나영재의 주위에는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는 듯 했다. 지금 그나마 이성을 잃지 않아서 다행이지, 그는 정말 자신의 힘을 통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왜 일부러 사람을 시켜 가윤이를 사고 나게 만든거야?”
“네가 원하는 차, 집, 돈까지 내가 다 준다고 했잖아.”
“뭐가 아직도 불만인거야?”
나영재는 마치 지옥에서 온 듯, 온 몸에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고 예리한 그의 두 눈은 한기를 품고 있는 것 같았고, 눈빛이 하도 깊어서 마치 사람을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언제 남을 해치려고 했다고 그래?” 안소희는 난데없는 질타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 모르는 척 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어?” 나영재가 입을 열었고, 목소리는 마치 얼음물처럼 차가웠다. “쇼핑하는 날을 일부러 오늘로 잡은 것도, 이 기회에 사람을 시켜 허가윤을 차사고로 죽게 하려고 했던 거잖아?”
“내가 허가윤이랑 같이 있었으면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그 사람 다치게 하지 않을거란 걸 너도 잘 알고 있으니까.”
나영재의 한마디 한마디는 사람을 얼게 만들 정도로 차가웠다.
방금 전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던 안소희는 이 말을 듣자 오히려 차분해졌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나영재를 바라보았고, 목소리에는 비아냥이 묻어있었다. “외도를 이렇게까지 고상하게 설명하는 사람은 아마 나사장이 처음일꺼야, 안 그래?”
“안소희!” 나영재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머리가 다친거면 병원에 가서 보이던가.” 안소희는 말다툼을 할 때엔 상대방이 누구든지 전혀 개의치 않는다. “문제를 생각할 땐 머리를 좀 거쳐. 내가 왜 이혼 후의 행복한 생활을 놔두고, 사람까지 시켜서 일부러 사고나게 하겠어? 내가 뭘 바라고?”
“뭘 바라는지는 네가 알잖아.” 나영재의 분위기가 점점 더 위험해졌다.
이를 본 안소희는 바로 알아챘다. “설마 내가 아직도 당신을 바란다고 생각하는거야?”
나영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표정과 태도가 이미 “그거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듯 했다.
“내가 당신한테 뭘 바라고?” 안소희는 분명한 태도로 연달아 그에게 되물었다. “날 누군가의 그림자 따위로 생각하는 당신을? 외도나 하는 당신을? 아니면 맘 속에 다른 누군가를 품고 있는 당신을?”
나영재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이 말들이 귀에 거슬리는 것 같아 바로 "난 외도한 적 없어."라고 반박했다.
“정신적인 외도도 외도야.” 안소희는 전혀 그의 체면을 생각해주지 않았다.
나영재는 이마를 찡그리며 “말 돌리지 마.”라고 했다.
“당신이 일부러 나한테 시비를 거는거야.” 안소희도 바로 맞받아쳤다.
나영재는 침묵을 지키며 더이상 말하지 않았고, 동굴처럼 깊고 차가운 눈빛이 그녀의 몸에 머물러 강한 압박감을 주었다. 그는 마치 오늘 안소희를 다시 처음으로 알게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안소희는 더이상 그와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허가윤이 내가 사람을 불러 사고를 낸거라고 말하면 내가 한게 되는거야? 그렇게 그 여자를 믿어?”
“그래.” 나영재의 분노는 그녀의 솔직한 시선때문에 점점 사그러드는 것 같았으나 주변의 냉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가윤이는 한번도 날 속인 적이 없어. 게다가 가윤이 손에 네가 했다는 증거가 있어.”
안소희는 눈썹을 살짝 치켜떴고,
가방을 쥐고 있는 손에는 힘이 들어갔으며, 감정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럼 차에 타. 내가 같이 병원에 가서 직접 만나볼게.”
안소희가 이렇게 말하자 나영재 주변의 한기도 같이 사라졌다. 나영재도 안소희가 이렇게 협조적일 줄은 몰랐다.
정말 그녀가 한 짓이라면 이렇게 간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순간,
그의 마음은 아주 모순적이였고, 도대체 그 증거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비켜.”안소희는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나영재를 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나영재는 그녀에 대한 속박을 풀어줬고, 일부러 거리감을 두면서 떠나는 그녀를 보니 알수 없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으나, 억지로 이상한 감정을 억누르고 차 키를 꺼내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