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이때 뒤에서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는데 오랜만에 들어서인지 나는 가슴이 떨리며 지난 일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하얀 셔츠를 입은 소년은 자전거를 타고 나를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연습장을 손에 든 소년은 나에게 골치 아픈 수학 문제를 설명해 주었다.
생리 기간에 소년은 내가 좋아하는 시원한 요구르트를 손으로 따뜻하게 해준 후 나에게 건네줬다.
나중에 하지훈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알게 된 소년은 눈시울을 붉히며 나에게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되느냐고 물었다.
즐거웠고 달콤하며 유감스러운 지난 추억들이 연기처럼 흩어지자 나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
나는 돌아서서 하석훈을 보았다.
‘하씨 가문의 유전자는 참 좋은가 봐. 하지훈이든 하석훈이든 모두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잘 생겼어.’
한 사람은 차갑고 도도했고 다른 한 사람은 온화하고 우아했다.
3년을 보지 못했을 뿐인데 하석훈은 예전보다 더 차분해졌다. 금테 안경을 쓴 두 눈은 얼음을 녹일 것처럼 온화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오랜만이야.”
하석훈은 웃으며 다가왔고 나도 평온하게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예전에 나와 하석훈은 할 말이 많았으나 지금은 마주 보고있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서먹해졌다.
분위기는 점점 어색해졌는데 감정이라는 건 한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갈 수 없었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 같았다.
나와 하석훈을 번갈아 보던 조유라는 웃으며 하석훈에게 말했다.
“아영이는 이제 자유의 몸이니 너 기회를 잘 잡아야 해.”
이 말을 들은 하석훈이 대뜸 나를 쳐다봤는데 그의 그윽한 눈빛을 보며 나는 저도 모르게 당황스러워졌다.
하석훈이 입을 열기도 전에 내가 급히 말했다.
“나 일이 있어서 먼저 돌아가야 할 것 같아.”
“아영아!”
하석훈이 재빨리 나의 손을 잡으며 상처받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이렇게 나를 보기 싫어?”
“아니야.”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하지훈의 애인이 아니더라도, 또 내가 하지훈과 아무런 관계가 없더라도 나는 이미 하석훈과 함께 있을 수 없었다.
예전에는 하석훈을 좋아했고 또 풋풋한 사랑을 했지만 지금은 이미 달라졌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 마음속의 감정도, 나 자신도 이미 변했다.
그윽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던 하석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의 집 형편을 나는...”
“괜찮아. 우리 집은 이미 많이 좋아졌어. 관심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유라가 방금 한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
나의 소원한 말투에 하석훈은 고개를 떨구었다.
하석훈은 씁쓸하게 웃었다.
“네가 그 사람이랑 이혼해도 난 여전히 기회가 없어? 그런 거야?”
그렇다고 대답하기도 전에 가방 속에서 휴대전화의 벨소리가 들려왔다.
휴대전화 화면을 보며 나는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고 저도 모르게 하석훈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훈이 걸어온 전화였다
‘이미 집에 도착했는데 내가 없는 것을 보고 전화한 게 아닐까?’
하지훈의 음침한 표정을 떠올리며 나는 전화를 받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전화벨 소리가 그치고 나서야 나는 서둘러 오영자에게 전화해 하지훈이 돌아왔는지 물었다.
하지훈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오영자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석훈은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형이랑 이혼했는데도 여전히 신경이 쓰여?”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말했다.
“미안해, 나를 잊어줘.”
말을 마친 나는 핑계를 대며 화장실로 향했다.
하석훈과 함께 있는 것이 불가능하니 더는 기대를 품게 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갚기 어려운 것이 감정 빚이다.
방금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는데 화가 났는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화장실에서 급히 하지훈에게 전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