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8장

서정희는 방으로 돌아갔다. 민경은 이미 깊이 잠든 상태였다. 그는 수건을 따뜻한 물에 적셔서 민경을 닦아주고, 떠나갈 때 아래로 내려다보니 가로등 아래에 임성훈이 여전히 바보처럼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서정희는 커튼을 쳤다. 아무것도 줄 수 없다면 상대방에게 어떠한 기회도 주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 하위현이 천천히 염정훈의 곁으로 다가왔다. “대표님, 사모님께서 이미 잠 드셨습ㄴ다. 돌아가세요.” “조금만 더 있다가.” 염정훈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눈보라가 어떻게 몰아치든 담배 한 대 다 피우고 나서야 떠나갔다. 이튿날 아침, 서정희는 업무를 처리하러 갔다. 그녀는 은행 출구도 나갈 수 없을 거라는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은행 직원은 그녀를 친절하게 대했다. 미리 차까지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고, 은행장이 직접 업무를 처리해 주었다. 맨 마지막에 출구까지 배웅하면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서정희는 은행을 나왔다.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 자신의 상상이 과도하게 예민했던 모양이다. 염정훈이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아니면 자신의 죽음을 이제는 받아들인 건가? 흩날리는 눈 가운데 서서 서정희는 자신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염정훈이 지나친 통제욕을 보일 때에는 역겹다가도, 진짜 자신을 내려놓았다는 생각을 하니 왠지 실망감이 밀려왔다. 이제 나도 과거를 지우고 앞으로 나아가야지. 서정희는 모교를 찾아갔다. 오가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니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이때 소년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정희 누나.” 약간 떨림이 느껴졌다. 서정희가 몸을 돌리자, A고등학교 교복을 입을 소년이 멀리에서 달려왔다. 당시 자신과 키가 거의 비슷하던 소년은 어느새 자신의 키를 훌쩍 넘어버렸다. 범이는 워낙 예의가 바른 아이였다. 공부를 하더니 더 점잖게 변한 것 같았다. “범이야, 오랜만이야.” 서정희는 소년의 가슴에 새겨진 이름을 보았다. 염도하. 당시 두 사람을 섬에서 데려온 후 염정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