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9장

서정희는 더 이상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어 말을 잇지 못하고 등을 돌렸다. 그곳에 1초라도 더 있을 때마다 자신에 대한 모욕과 그동안 염정훈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증명하고 있는 듯했다. 염화진이 서씨 가문과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지만 염정훈은 여전히 부드러운 말투로 ‘화진’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날 밤 자신의 몸에 독을 주입해 하마터면 영영 숨이 멎을 뻔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순간 염정훈의 숨소리조차 구역질 나게 느껴졌다. 자기 앞에서 사랑을 말하며 꼭 진실을 설명해 주겠다고 하던 염정훈이 사실은 그 증거들을 완전히 없애 그녀가 영원히 모르게 하는 것이었다. 이게 바로 그가 말한 사랑일까? 서정희는 자리를 떠나면서 테라스 구석에 있는 돌을 주워 손에 꼭 쥐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이 돌로 염정훈의 머리를 내려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서정희는 길게 한 번 심호흡을 한 후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염화진의 목소리는 거칠었고 이번에는 그녀도 자신을 위장하지 않았다. “당신의 여동생은 이미 죽었고 지금 살아있는 것은 그저 산송장이야.” 그녀의 목소리에는 기복이 전혀 없었다. 염정훈은 아직도 어린 시절의 염화진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꽃다운 나이인데 어찌 나이 많은 노인처럼 퇴폐해졌단 말인가? “화진아, 너인 거 알아. 오빠에게 말해 봐, 왜 집에 안 가는 거야? 서정희가 너의 올케언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염화진은 그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그래, 내가 한 거야. 그 여자를 위해 복수를 하고 싶으면 나를 죽여. 어차피 나도 별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말을 마친 그녀는 목을 꼿꼿이 쳐들고는 죽음 따위는 전혀 두렵지 않은 얼굴로 대들었다. 순간 염정훈은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요즘 그는 염화진과 재회하는 장면을 머릿속에서 여러 번 상상했지만 오늘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염화진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죽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 여자 해쳐서 뭐? 그래, 다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