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서정희의 몸은 그대로 쓰러지지 않았고 누군가가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를 부축한 사람은 염정훈이 아니라 진상정이었다. 고개를 들자 멀지 않은 곳에서 염정훈이 그녀가 쓰러지는 것을 차갑게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두 눈에 놀란 기색은 전혀 없었고 무심함 뿐이었다.
하긴 그랬다. 그의 눈에는 맨바닥에 제대로 서 있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으니 분명 연기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게 뻔했다.
지금 염정훈은 그녀를 향한 미움만 존재할 텐데, 걱정해 줄 리가 없었다.
오히려 진상정이 걱정스레 물었다.
“사모님,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그냥 저혈압이 좀 와서.”
서정희는 비웃음을 흘린 뒤 다리를 들어 염정훈을 따라갔다.
밤새 내린 탓에 마당은 눈으로 가득 찼다. 저택의 고용인들은 다 어디로 간 건지 마당에 쌓인 눈을 치우는 사람도 없었다. 그 짧은 길을 서정희는 숨을 헐떡이며 굴었다.
눈과 바람을 맞으며 방으로 들어가 몸을 녹이려는데 문가에 선 염정훈이 비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 예전보다 확실히 연기력이 늘었어.”
당시에 그를 붙잡기 위해 서정희는 쓸 수 있는 수는 전부 다 썼었다. 그녀가 예전에 가장 무시했던 울고 불며 매달리는 짓도 마다하지 않앗었다.
그 말을 듣자 서정희는 우습다는 생각만 들어 해명을 하지 않고 그저 웃음만 터트렸다.
“칭찬 고마워.”
그녀는 덤덤한 얼굴로 염정훈의 곁을 지나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의 따뜻한 기운에 조금 편안해진 그녀는 두꺼운 패딩을 벗고는 스스로 따뜻한 물을 따른 뒤 부드러운 소파에 푹 눌러 앉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
“말해, 도대체 이혼할 거야 말 거야?”
“이혼할 때면 통보할 테니까 일단은 여기서 지내.”
그의 맞은편에 덤덤하게 앉아있는 서정희는 손가락으로 모자의 늘어진 공을 가지고 놀았다.
“염정훈, 내가 조산하고 일주일 되던 날에 나한테 이혼을 요구했잖아. 예전에는 네가 왜 그렇게 조급해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그날 너랑 눈매가 닮은 그 애를 보고 나서야 깨달았어. 그렇게 급하게 날 떠나려는 건 백지연에게 집을 주고 싶어서 그런 거였어.”
그렇게 말하는 서정희는 목소리가 떨렸다.
“지난 1년동안 네가 아무리 나한테 냉담하게 굴었어도 난 고집스럽게 과거의 너를 떠올리며 너의 뒷모습, 너의 매장함을 가렸었어. 어쩌면 그냥 잠깐 놀고 싶은 거겠지, 나야말로 네 진짜 아내니까, 분명 내가 뭘 잘못했으니까 날 무시하는 걸 거야,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너의 모든 잘못까지 끌어안으려고 했어.”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멍청해. 네가 다른 사람과 살림을 꾸미고 있었을 때 난 그 썰렁한 집을 지키면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지.”
“난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1년이 걸렸고, 과거의 내가 얼마나 멍청했는지도 알게 됐어. 그러니까 이제 놓아줄게 너만의 행복을 찾아도 좋고 그 사람들과 가정을 이뤄도 좋아. 난 상관없어.”
서정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휘청이며 다가갔다. 눈물이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 차가운 대리석에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염정훈의 앞에 서서 평온한 얼굴로 똑바로 앉아있는 남자를 살펴봤다. 아무런 표정도 하고 있지 않았지만 주변에서 풍기는 아우라는 놀랍도록 차가웠다. 마치 언제든 화를 낼 수 있는 교감선생님 같았다.
과거에 그의 이런 표정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향하고 있었고 그녀를 볼 때면 언제나 쉽게 알아챌 수 없는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이 남자는 진작에 포기하는 게 맞았다.
서정희는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얼굴에는 염정훈이 본 적 없는 절망이 드리웠다.
“염정훈, 내가 너 놓아줄게. 그러니까 너도 나 좀 놓아줘, 응?”
거의 애걸에 가까운 목소리에 염정훈은 심장이 조여왔다. 그는 서정희 얼굴에서 피곤함을 발견했다.
마치 무너지기 직전의 댐이 터져 나온 홍수 속에서 오랫동안 우뚝 서 있었는데,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던 댐에 어느 날 갑자기 구멍이 하나 발견되었고, 그것이 포기한 순간 그대로 홍수에 집어삼켜 댐으로 된 모에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는 기분이었다.
포기는 언제나 사수보다 쉬웠다.
댐이 홍수에 집어삼켜지는 순간, 댐이 얼마를 버텼는지, 얼마나 힘들게 사수하고 있었는지, 얼마나 힘들었기에 그토록 오랫동안 이어왔던 믿음을 포기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복수 외에 염정훈이 이렇게 다급하게 이혼하는 건 아들을 자신의 호적에 올리기 위해서였다.
1년간의 실랑이 끝에 서정희가 그를 완전히 놓아준 이 순간, 염정훈은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놓아주길 바란다고? 꿈 깨! 오늘부터 넌 이곳에 남아. 넌 평생 내 사람이고, 죽어서도 내 사람이야.”
서정희의 눈물이 그의 얼굴에 떨어지자 염정훈의 마음도 따라서 젖는 듯했다.
그는 짜증스레 휴대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바로 임성결이 119에 실려 가는 모습이었다.
“또 이 남자와 연락한다면 다음에 누워 있게 되는 건 그 사람 온 가족이 될 거야. 서정희, 넌 평생 원하는 대로 살 수 없을 거야.”
“개자식! 바라는 게 있으면 날 찾아와야지. 왜 임성결에게 그러는데?”
서정희의 손이 뺨을 내려치기도 전에 염정훈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의 두 눈에 분노가 가득했다.
“그렇게 신경이 쓰여? 잊지 마, 이혼하지 않은 한 넌 내 아내야.”
“나…”
서정희가 설명하기도 전에 몸이 가벼워지는 게 느껴졌다. 염정훈이 그녀를 안아 올렸다.
염정훈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짜증이 가득했다. 염정훈은 안방의 침대에서 그녀를 세게 내려놓았다.
다행히 침대 매트리스는 당시 그녀의 취향에 따라 만들어진 거라 부드럽고 탄력 있어 다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거칠게 내던져지니 안 그래도 어지럽던 머리는 더 세상이 도는 것만 같았다. 괴로움이 극에 달해 그녀는 무력하게 침대 위에 늘어진 채 두려움에 찬 눈으로 침대 앞에 서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염정훈은 마디가 선명한 손으로 짜증스레 넥타이를 풀었다. 마치 악마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 섬뜩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침대 위에서 덜덜 떠는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희야, 그동안 그 자식이랑 같이 있었던 거야? 그 자식이 널 건드리지는 않았어?”
거의 2년 만에 듣게 되는 호칭에 서정희는 그저 변태같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고 온몸에 소름이 오도도 돋았다.
염정훈은 마치 쇠사슬에 묶인 짐승이라도 된 듯, 사슬을 벗어던지고 그녀를 향해 달려들려고 했다.
서정희는 고개를 저으며 해명하려 했다.
“우린 그저 친구 사이야.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더러운 사이 아니야.”
“더러워? 하…”
얇은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며 차가운 미소를 짓더니 그는 손을 뻗어 서정희의 발을 잡았다.
서정희는 괴로움을 꾹 참으며 발버둥 쳤지만 작은 그녀의 힘은 솜방망이 같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서정희는 염정훈이 요 며칠 동안 모든 곳을 뒤지고 다녔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몇 날 밤을 다 합쳐도 10시간도 채 자지 못했다. 오랜 기간동안 두 눈을 가린 원한은 마치 수많은 부정적 에너지를 흡수한 악마와도 같아 그에게는 분출할 곳이 필요했다.
염정훈은 서정희의 신발과 양말을 벗겼다. 수백개의 밤동안 건드리지 않았던 여자에 그는 온몸의 피가 한곳으로 쏠리는 듯했고 두 눈에는 욕망이 가득 들어찼다.
서정희는 지금 그의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어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안돼, 염정훈. 이러면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