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가희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하도훈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고개를 숙이고 보니, 바닥에는 떨어진 포도들로 인해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즉시 몸을 숙여 포도를 주웠고, 그녀가 몸을 숙인 순간, 하도훈도 동시에 몸을 숙였다.
두 사람은 우연히 동시에 같은 포도를 줍게 되었고, 그 순간 두 사람의 손이 한데 닿게 되었다.
하도훈의 손은 축축하고 따뜻했다.
가희는 고개를 숙이고, 무의식적으로 손을 뒤로 빼버렸다.
하도훈도 당연히 그녀의 행동을 주의하게 되었고, 손가락을 뒤로 거두었다.
밖에 있는 사람들도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고, 진이나가 바로 물었다. "가희야, 무슨 일 있어?"
하도훈은 밖에서 들려오는 진이나의 목소리를 듣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별일 아니야."
가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더 이상 움직이지도 않은 채로, 하도훈이 바닥에 떨어진 포도들을 주워 다시 씻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넌 좀 닦고 나와, 나 먼저 나갈게."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병실을 향해 걸어가며, 반쯤 말았던 소매를 다시 팔에서 내렸다.
가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세면대의 한 모서리를 꽉 잡았다.
가희는 시간을 좀 들여 옷에 묻은 우유 자국을 닦아냈고, 콸콸 흐르는 물소리가 병실에서 하도훈과 진이나가 나누는 말소리를 가렸다.
그녀가 천천히 정리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왔을 때,
마침 하도훈이 외투를 들고 일어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난 일이 좀 있어서 가희를 데려다주지 못할 것 같아. 잠시 후 기사님한테 다시 가희 데리러 오라고 할게, 이참에 가희가 너랑 좀 더 말동무도 하고."
그가 그녀를 이곳에 남겨두고, 잠시 후 기사님더러 그녀를 데리러 오게 하려는 것은 아마도 두 사람이 따로 같이 있는 상황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가희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었다.
이때 진이나가 말했다. "난 가희가 말동무하지 않아도 되니까, 네가 가희랑 같이 가."
그러면서 진이나는 병상 옆에 있는 하도훈의 손을 꼭 잡았다. "부탁할게, 도훈아."
하도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고, 이때 마침 진이나가 고개를 들면서 두 사람의 눈빛이 한데 맞닿게 되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어떤 감정들이 담겨 있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간병인이 탕비실을 다 정리하고 나서야, 하도훈이 대답했다. "그래."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은 진이나는 자기 손을 하도훈의 옷에서 떼어냈다.
가희는 이 상황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고, 그곳에 멍하니 서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둘 사이의 분위기가 어떤지는 가희도 알 수 있었다. 한 사람은 그녀를 밀어내려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녀를 하도훈에게 밀어 넣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가희는 여기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그곳에 한참이나 서있던 하도훈이 그제야 몸을 돌려, 멍하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가희를 향해 말했다. "가자."
그는 말을 마치고 먼저 걸어 나갔다. 가희는 입을 열어 뭐라도 말하려고 했으나, 희망에 가득 찬 진이나의 눈빛을 보고는 모든 말을 삼키고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하도훈은 계속 침묵하고 있었다.
가희는 방금 병실에서 언니와 그 사이에 뭔가 충돌이 있는 것 같았고, 그 충돌은 또한 아주 미묘한 것 같았다.
긴 침묵 속에서 차는 드디어 진씨 주택 앞에 도착했고,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던 하도훈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난 더 배웅하지 않을게."
그의 말에서는 담담한 회피와 거리감이 느껴졌다. 가희는 그에게 "도훈 오빠, 고마워요."라고 말하고는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그녀도 더 얘기를 나누고 싶은 심정이 아니었고, 얼른 그 자리를 피하고만 싶었다. 그녀가 곧 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하도훈이 갑자기 그녀를 다시 불렀다. "가희야."
차 문을 밀던 가희의 손이 멈칫했고,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옆에 앉아 있던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와 네 언니의 일은 너랑은 상관이 없는 일이야."
그는 차분한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고, 그가 가리키는 것은 방금 병원에서 벌어진 둘 사이의 밀고 당기기였다.
그 누구라도 이렇게 중간에 끼어 남들에게 서로 밀쳐진다면 자존심이 상하기 마련이다. 다행히 가희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명확한 판단을 하고 있었고, 그녀는 하도훈의 앞에서 입술을 살짝 깨물고 한참이 지나서야 대답했다. "괜찮아, 난 괜찮아, 도훈 오빠."
그의 대답을 들은 하도훈은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
두 사람은 이렇게 겨우 두 마디를 나누었고, 가희는 바로 차에서 내려 진씨 주택을 향해 도망치듯이 달려갔다.
하도훈의 차는 진씨 주택 앞에 몇초간 머물러 있었고, 그는 차에 앉아서 달려가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시선을 거두었고, 그가 차의 손잡이를 툭툭 치자 기사님이 차를 돌려 진씨 주택에서 출발했다.
집에 돌아온 가희는 수많은 문자를 받았다. 모두 동창생들이 보낸 문자였는데, 전부 그와 우지성 사이에 관해 물어보거나 우지성이 그녀를 찾고 있다는 내용들이었다.
가희는 마치 타조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그 메시지들을 전부 다 삭제하였다.
그리고 며칠 동안 집에서 나가지 않았고, 학교에도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희숙은 매일 많은 국을 끓여 가희에게 몸보신을 시켜주었는데, 가희는 이 국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거절하지도 않았다.
고희숙이 가져다주면, 그녀는 그냥 다 마셔버렸다.
모두가 그녀의 배에 주목하고 있었다.
가끔 가희는 자신이 남들 눈에는 사람이 아니고, 다만 언니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도구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