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이 어둑해졌다.
심자영은 아직 입학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게 떠올라 화실로 가보려고 했다.
문 앞에 다가가자, 하인이 안에서 청소하고 있는 걸 보았다.
원래 그녀의 그림이 놓여 있던 자리에 비싼 수입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그녀의 그림과 물감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모두 강유리의 악보와 관련된 물건들로 채워져 있었다.
"내 그림 어디 있어요?"
심자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림들은 단순히 그녀의 정성이 담긴 작품들이 아니었다. 그중 하나는 그녀의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남긴 유작이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시골로 그림을 그리러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심자영의 할머니는 그 그림들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고 확신했고, 결국 심자영의 엄마가 그린 모든 그림들을 불태워버렸다.
그 그림은 그녀가 불길 속에서 손을 다치며 간신히 구해낸 것이다.
그녀 엄마의 마지막 유물이었다.
심자영이 아주 아꼈었고 전에는 주경민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는데 지금 그 그림이 사라졌다.
심자영이 급해하면서 눈물을 흘리자 하인은 난감 해했고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의 소리가 들려왔다.
"자영아, 왔어."
강유리가 손에 악보를 들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오더니, 그녀가 우는 걸 보고서야 반응하고는 미안해하며 말했다.
"미안, 네 화실을 차지했네. 내가 곧 대회에 참가할 건데, 민이가 이 방이 넓고 환해서 연습하기 좋다고 해서 바로 들어오라고 했거든."
심자영은 그녀한테 다가가며 말했다.
"내 그림 어디 있어?"
"그 그림들 말이야."
강유리는 달콤하게 웃었다.
"민이가 별로 중요한 게 없다고, 나한테 마음대로 처리하라고 해서, 하인들한테 다 버리라고 했어."
심자영은 믿을 수 없어 눈을 동그랗게 떴고 몸을 부들거렸다.
주경민이 분명 그 그림이 그녀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데, 강유리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녀의 그림을 버리라고 한 것이었다!
"자영아, 괜찮아?"
심자영은 고개를 번쩍 들고는 강유리의 손을 잡고 눈이 새빨개져서 소리쳤다.
"그림 어디에 버렸어? 돌려내!"
"아파, 자영아."
강유리는 아파서 미간을 찌푸렸고 고의적으로 말했다.
"밖에 쓰레기통에 버렸어, 어쩌면 진작에 가져갔을 수도..."
심자영은 그녀를 밀어내고는 재빨리 밖으로 뛰어나갔다.
밖에는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심자영은 지체할 겨를도 없이 쓰레기통을 뒤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별장 근처의 쓰레기통에서 버려진 그림들을 찾았다.
그러나 모든 그림들이 엉망이 돼있었다. 기름얼룩과 물감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특히 주경민과 함께 찍은 사진을 그린 그림에서는 그녀의 얼굴이 마치 누군가 복수라도 하듯, 검은 물감으로 덮여 얼굴조차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심자영은 슬픔을 참으며 쓰레기통 옆에 무릎을 꿇고 하나하나 그림을 뒤지다 마침내 엄마의 유작을 찾아냈다. 다행히 다른 그림들 밑에 깔려 있어 약간의 물감만 묻어 있었다.
그녀는 되찾은 소중한 유품을 품에 안고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몸이 흠뻑 젖고 처참한 상태였지만, 마음속의 차가운 공허함과는 비교과 되지 않았다.
화실 문 앞을 지날 때, 그녀는 주경민이 강유리를 품에 안고 다정하게 속삭이며 위로하는 모습을 보았다.
강유리 주위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주성호와 그녀의 이모와 장미숙도 있었다.
그녀를 보더니 주경민이 싸늘하게 말했다.
"너 이리 와."
심자영은 그림을 꽉 잡고는 몸이 굳은 채로 방에 들어갔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한테 집중되었다.
심자영이 흠뻑 젖은 걸 보고, 추영자가 안쓰러워하며 말하려고 하는데, 주경민의 질타하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유리를 화실로 옮기라고 한 건 내 결정이었어, 불만 있으면 나한테 화풀이해, 왜 사람을 다치게 해?"
"쟤가 내 그림 던졌어, 그게 우리 엄마 유물인 거 알잖아."
심자영은 눈이 새빨개져서 주경민을 빤히 노려보며 고집스럽게 물었다.
"그것도 네 결정이었어?"
주경민은 순간 멈칫했다.
"유리는 모르잖아, 화풀이하지 말았어야지, 지금 당장 유리한테 사과해, 그럼 없었던 일로 해줄게."
"난 잘못이 없어, 왜 사과해야 하는데!"
심자영은 몸을 부들거리며 실망에 차서 주경민을 바라보았다.
주경민은 낯빛이 어두워졌다.
장미숙은 바로 억울해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성호야, 애들이 결혼한다고 공개한 지 얼마나 됐다고, 유리가 벌써 두 번이나 다쳤어. 자영이랑 새언니가 우릴 안 반기는 거 아니야, 우리 모녀가 그냥 나가는 게 낫잖아?"
"헛소리! 내가 있는데 누가 감히 너희를 쫓아내?"
주성호는 안쓰러워하며 장미숙의 손을 잡고 뒤도 안 돌아보고는 추영자를 혼냈다.
"조카 교육 어떻게 한 거야, 아주 고치질 않네! 다음에 또 이런 일 있으면 두 사람 같이 주씨 가문에서 꺼져야 할 거야! 지금 당장 유리랑 미숙이한테 사과해, 안 그러면 투자 철회할 거야!"
추영자는 자신과 십 년을 넘게 산 남편을 바라보며 순간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녀도 남편이 장미숙을 편애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주성호가 이 여자 때문에 회사로 협박할 줄 몰랐다.
순간, 그녀는 자신이 애써 유지했던 결혼생활이 정말 우습게 느껴졌다.
심자영은 창백해진 이모의 얼굴을 보더니, 미안한 느낌이 들었고 자신이 또 이모를 힘들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됐어요, 민아, 아버님. 자영이가 급해서 그런 거지, 일부러 그런 게 아닐 거예요, 자영이 용서해 주세요."
강유리는 이제 마무리해도 될 것 같았는지 그제야 나와서 착한 척했다.
"참 배려심도 깊어."
주성호는 그녀를 칭찬하면서 뒤돌아 추영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 따라와."
심자영이 뭐라고 하려 했지만, 추영자가 그녀의 손을 다독이고는 뒤돌아 주성호를 따라 나갔다.
방에는 세 사람만 남았다.
"자영아, 앞으로 이렇게 흥분하면 안 돼. 다음에 또 이러면 새언니가 진짜 화낼 거야."
강유리는 어른인 척하며 혼내고는 주경민을 바라보았다.
"민아, 이 피아노방 너무 마음에 들어, 하지만 창문 앞에 있는 저 치자꽃나무 냄새가 너무 심해, 마음에 안 들어, 베어버리면 안 돼?"
"네 말대로 해."
"안 돼!"
주경민과 심자영이 동시에 말했다.
심자영은 차가운 주경민의 얼굴을 보며 힘겹게 말했다.
"오빠, 저 나무는 그때 우리가 같이 심은 거야, 잊었어?"
"고작 나무일뿐이잖아, 그것도 따지고 들 거야?"
주경민은 표정이 싸늘해져서 미간을 찌푸렸다.
"자영아, 언제부터 이렇게 철이 없었던 거야?"
심자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고 입술을 파르르 떨었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나무는 그녀가 여덟 살 되던 해에, 주경민이 그녀를 위해 심어준 꽃이었다.
나무가 여기 있으니 자영의 집도 여기 있다고 했었다.
주경민과 심자영은 매년 같이 할 거고 영원히 안 헤어질 거라고 했었다.
그는... 모두 잊었다.
심자영은 자기도 모르게 씁쓸한 느낌에 헛웃음을 쳤다.
"하지만 오빠, 저게 마지막 한 그루야."
강유리가 주씨 가문에 들어오고 나서, 그녀의 물건들을 하나둘씩 빼앗겼다.
주경민이 그녀를 위해 직접 만들었던 그네도 없애고는 강유리를 위해 정자를 지어주었다.
유리로 된 꽃방에 열심히 키웠던 치자꽃도 모두 강유리가 좋아하는 백합으로 바뀌었다.
이젠, 그들의 마지막으로 공유하고 있는 추억까지도 빼앗으려는 것이었다.
주경민은 덤덤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답하지 않았는데, 마치 묵인하는 것 같았다.
심자영의 눈빛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직접 그 나무를 베어버리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