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집에 가거나 이혼하거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정아진은 서둘러 해명했다.
“유정 씨, 나랑 수호는 단지 친한 친구일 뿐이야. 혹시 무슨 오해라도 있는 건 아니지?”
친구? 오해?
누가 봐도 뻔한 여우짓을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김유정은 실소를 터뜨렸다.
“그래? 서지태도 있는데 어디 한 번 껴안아 보지? 자.”
이내 손을 뻗어 남자들을 가리켰다.
“다 아진 씨 친구들이니까 한 명씩 안아주면 되겠네?”
정아진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지더니 난색을 보였다.
김유정은 옆에서 구경하던 송정우을 바라보더니 싱긋 웃었다.
“정우 씨랑 수호 씨는 친구라서 껴안는 것쯤이야 쉽지 않겠어?”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은 송정우는 연신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된 몇몇이 대뜸 웃음을 터뜨렸다. 연수호는 손에 든 담배를 비벼끄더니 당구공을 집어 냅다 던지고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으르렁거렸다.
“웃겨?”
다들 연수호의 성질을 잘 알고 있는 만큼 이 말을 듣자마자 감히 찍소리도 못했다.
김유정은 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흘긋 쳐다보았다. 그리고 연수호가 화를 내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었다.
“1시야.”
이내 연수호의 손에 있는 큐대를 잡고 뒤돌아서 당구대 위에 납작 엎드렸다. 프로다운 자세는 그녀의 완벽한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한방에 연속 5개의 공을 포켓에 넣었고, 두 번째 만에 게임을 끝냈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은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
그리고 허리를 펴고 큐대를 바닥에 툭 던졌는데 정아진의 발밑까지 데굴데굴 굴러갔다.
김유정은 연수호의 그윽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끝났지? 10분 줄 테니까 나와. 1층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연수호가 비아냥거렸다.
“왜? 나 없으면 잠이 안 와?”
“당연하지.”
김유정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남편이 버젓이 살아있는데 생과부가 되고 싶지 않거든?”
지금 저주라도 퍼붓는 건가?
연수호는 화가 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심지어 송정우를 비롯한 일행도 이 말을 듣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말이 심한 사람은 봤어도 이렇게 독한 건 처음이었다.
연수호는 팔을 뻗어 긴 손가락으로 김유정의 턱을 움켜쥐고는 그녀의 장밋빛 입술을 빤히 쳐다보았다.
“김유정, 입에 독약이라도 머금었어?”
김유정은 억울한 표정으로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어제 키스했는데 수호 씨는 아직 멀쩡하잖아.”
연수호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나지막이 경고했다.
“내가 죽기 전에 그 입부터 막아버릴 거야.”
말을 이어가는 남자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김유정을 집어삼킬 듯싶었다.
김유정은 턱을 치켜든 채 생글생글 웃으며 살벌한 눈빛을 마주했다. 언뜻 듣기에는 달콤살벌한 경고 같았지만 두 눈에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유정 씨, 오해야. 나랑 수호는 아무 사이 아니야.”
정아진의 목소리는 둘 사이에 흐르던 미묘한 분위기를 와장창 깨뜨렸다.
“나 원래 털털한 사람이라는 걸 유정 씨도 알잖아. 수호도 그렇고 정우랑 형제처럼 허물없이 지내는 편이거든. 다 같이 드라이브하러 갔을 뿐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게다가 우리가 정말 그런 사이라면 일찌감치 사귀고 있었겠지.”
그녀는 말을 마치고 나서 연수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 그래? 수호야?”
연수호는 김유정의 턱에서 손을 떼고 짜증 섞인 얼굴로 정아진을 노려보았다.
“말이 많네.”
쌀쌀맞은 태도에 정아진이 맞받아치려고 했지만 불쾌함이 역력한 그의 표정을 보고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김유정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동안 내가 마주쳤던 여우만 하더라도 몇 명인지 알아? 만약 수호 씨한테 마음이 눈곱만큼이라도 있다면 와이프 자리까지 꿰차고 나서 정정당당하게 애정 표현하는 게 어때? 아니면 눈치껏 기어 다녀.”
더는 기업 이미지를 위해 하루가 멀다고 홍보팀에 부탁해서 연수호 대신 루머를 잠재우는 수고를 마다하고 싶지 않았다.
뒤에 서 있던 안서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맞아. 연씨 가문에 쉽게 들락일 수 있을 거로 생각해? 아무나 수호 오빠의 와이프가 되는 게 아니라고.”
안서우는 우쭐거리며 말했다. 이에 정곡을 찔린 정아진은 지지 않고 받아쳤다.
“연씨 가문에 들어가기 힘들다는 거 누가 몰라? 만약 3년 전의 교통사고만 아니었다면 유정 씨도...”
“정아진, 그 입 다물지 못해?”
연수호는 나지막이 경고하며 정아진의 말을 끊더니 별안간 다리를 들어 옆에 있는 테이블을 걷어찼다. 곧이어 술병과 술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쨍그랑 깨졌고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은 산산조각이 났다.
“젠장! 닥치라고 했잖아. 귓구멍이 막혔어?”
깜짝 놀란 정아진은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나 다를까 연수호는 아직도 3년 전의 사건을 잊지 못한 듯싶었다.
진심으로 화가 난 그의 모습에 다른 사람도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도 차마 나서서 말리 거나 찍소리를 못 냈다. 분위기는 금세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됐어, 아진아. 지나간 얘기는 그만해.”
송정우가 수습하기 위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수호야, 아진이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인데 친구끼리 굳이 화를 낼 필요 있어?”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의 연수호는 마치 한 마리의 성난 사자를 연상케 했다.
김유정은 그가 왜 화가 났는지 알고 있었다.
3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연수호의 곁을 지켰던 여자는 병상에 누워 아직 혼수상태에 빠졌다.
첫사랑이 입원한 와중에 강제로 사랑하지 않은 여자와 결혼했다는 자체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3년 전에 그녀도 원해서 결혼한 건 아니었다.
아버지끼리 제멋대로 정한 약속일지언정 연태상이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인지라 마지못해 결혼식을 올려야만 했다.
오죽했으면 무려 이정 그룹의 귀한 딸이 예식조차 하지 않고 아쉬움을 꾹꾹 눌러 담은 채 고작 혼인 신고만 하고 끝냈겠는가?
결혼하고 나서 3년 동안 그녀는 연수호의 아내이자 유안 그룹의 사모님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던 김유정은 갑자기 정색하더니 정아진을 빤히 쳐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해주길 원해? 차라리 이참에 수호 씨한테 이혼하라고 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이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주변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자그마한 인기척이라도 똑똑히 들릴 듯싶었다.
안서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지 홧김에 내뱉은 말인 줄 알고 손을 뻗어 김유정의 팔을 잡아당겼다.
“유정 씨?”
연수호는 싸늘한 눈빛으로 김유정을 쏘아보더니 가녀린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다시 한번 지껄여 봐.”
김유정은 겁을 먹기는커녕 남자의 손을 탁 쳐냈다.
“다시 한번 말할게. 집에 가거나 이혼하거나 알아서 선택해.”
...
레스토랑을 나선 김유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한 말은 협박도 홧김에 하는 말도 아니었다.
설령 그녀가 이혼을 빌미로 협박한다고 한들 연수호는 절대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물론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3년이 지난 지금 연태상과 약속한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는 이미 실현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만약 그 교통사고만 아니었다면 이루고도 남았지 모른다.
또한, 연수호가 파혼하고 몇 년 동안 사귀었던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해도 순순히 물러났을 것이다.
적어도 서로에게 고통뿐인 결혼 지옥에 갇혀 사랑하는 남자가 하루가 멀다고 다른 여자를 만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등 뒤는 적막이 감돌았고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김유정은 몰래 조소를 머금었다. 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걸까?
‘우습군.’
이내 자기 차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이때, 검은 형체가 계단을 서둘러 내려왔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다름 아닌 연수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