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파렴치한 사람
밤 12시, 으리으리한 휴스턴 별장은 2층 안방에만 불이 훤히 커져 있었다.
테이블에 놓인 휴대폰이 지칠 줄 모르고 쉴 새 없이 울렸다.
김유정은 한 손으로 패션 잡지를 넘기다가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곧이어 귀청을 찢을 듯한 안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정 언니, 뭐 하는데 이렇게 늦게 받아요?”
“책 봐.”
이내 늘씬한 손가락으로 잡지의 한 페이지를 잡고 나른하게 대답했다.
이 말을 듣자 안서우는 펄쩍 뛰었다.
“지금 책 읽을 겨를이 어디 있어요? 방금 내가 보낸 사진은 봤어요?”
“응.”
김유정의 말투는 여전히 여유만만했고 하품까지 했다.
10분 전, 그녀의 휴대폰에 안서우가 보낸 사진 한 장이 떴다.
이는 날렵한 디자인의 검은색 BMW 바이크를 타고 있는 연수호의 사진이었다. 블랙 바이크 슈트 차림의 남자는 환한 가로등 불빛을 받아 갈색 짧은 머리가 유난히 빛이 났고, 왼쪽 귀에는 다이아몬드 피어싱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리고 조각상처럼 뚜렷한 이목구비를 자랑하는 옆모습은 잘생김의 극치를 보여줬다.
뒷좌석에는 가녀린 여자가 타고 있었고 검은색 생머리를 휘날리며 아리따운 얼굴에 진심 어린 미소가 번졌다.
여자는 두 팔로 연수호의 단단한 허리를 꽉 끌어안았고, 가슴을 넓은 등에 거의 밀착하다시피 했다.
김유정은 사진을 보자마자 휴대폰을 껐다. 연수호가 그녀에게 뒤치다꺼리시키는 게 어디 한 두 번인가?
“언니는 오빠랑 결혼한 법적 배우자이자 무려 유안 그룹의 사모님이죠. 그런데 반응이 왜 미지근해요?”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안서우의 목청에 고막이 터질 지경이었다.
“정아진 그 여유 같은 년이 하루가 멀다고 언니 남편과 붙어 다니는데 어떻게 화를 한 번 안 내요?”
김유정은 안서우 때문에 고막이라도 찢어질까 봐 휴대폰을 멀리 떨어뜨리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아무리 튼튼한 목줄이라도 도망가기로 마음먹은 개는 못 잡아.”
대수롭지 않은 그녀의 반응에 되레 화가 난 안서우가 씩씩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나한테 새언니는 유정 언니뿐이에요. 다른 여자는 관심도 없고 특히 정아진은 더더욱 인정해주지 않을 거예요. 주소 보낼 테니까 가서 우리 오빠 데려와요. 난 먼저 가서 기다릴게요.”
안서우는 따발총처럼 쏘아대더니 전화를 끊었다. 김유정은 휴대폰에 뜬 주소를 내려다보더니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물론 연수호가 외박하고 정아진과 함께 있었다는 것만 떠올리면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이미 적응이 되어서 무뎌졌다.
결혼 3년 차, 외부에서는 유안 그룹 연수호가 아무리 제멋대로에 성질이 괴팍하다고 해도 유독 자기 와이프에게 사족을 못 쓰고 뭐든지 다 해준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정작 연수호의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는 사실은 그녀만 알고 있을 뿐이다.
둘이 결혼하게 된 것도 단지 부모님들의 약속에서 비롯되었다.
즉 연수호의 아버지 연태상이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을 위해서라도 임씨 가문의 며느리로서 체통을 지켜야 했다.
...
안서우가 알려준 위치는 양화구에 있는 독채로 된 모터스 다이닝이었다.
빨간색 페라리가 입구에 멈춰 섰고, 김유정은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입구에 주차된 수십 대의 고가 바이크 사이에서 연수호의 BMW 바이크를 한눈에 발견했다.
안서우는 그녀를 차에서 끌어 내리더니 급히 레스토랑으로 걸어갔다.
곧장 3층 오락실로 향하자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문밖까지 들렸다.
그리고 문을 여는 순간 짙은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방 안에 열댓 명의 젊은 남녀가 있었는데, 특히 남자들은 부와 권력을 동시에 거머쥔 도련님으로 경성시에서 이름을 날렸다.
하긴, 국내에서 제일 잘 나가고 부유한 집안의 도련님과 어울려 다니는 사람이 수준이 떨어져봤자 얼마나 떨어지겠는가?
남자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당구를 치거나 다트를 하고 술도 마셨으며, 옆에는 간드러지게 웃는 여자들이 자리를 지켰다.
김유정의 시선은 가장 눈에 띄는 한 남자에게로 향했다.
사진 속 검은색 바이크 슈트 차림의 연수호는 큐대를 든 채 입에 값비싼 담배를 물고 있었고, 왼쪽 귀에는 피어싱이 눈부시게 빛났다.
완벽한 이목구비는 흠잡을 데 없고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건방진 느낌마저 들었다. 갈색의 머리카락은 자연스럽게 흐트러져 지저분해 보이기는커녕 피부를 더욱 하얗고 돋보이게 했다.
날라리 같으면서 고귀한 분위기는 상반된 듯싶지만 한데 어우러져 의외로 그의 이미지와 조화를 이루어 감탄을 자아냈다.
비록 지난 3년 동안 질리게 봐왔던 남자지만 김유정은 여전히 놀라울 따름이다.
이렇게 훌륭한 사람을 얻기 위해서라면 여자들이 줄을 짓기 마련이다.
반면, 그녀는 결혼해서 지금까지 마치 두더지를 잡듯이 연수호의 옆에 여자가 나타날 때마다 쫓아내기 바빴다.
그중에서 유일하게 고배를 들게 한 사람이 바로 정아진이었다. 이 순간에도 연수호의 옆에 서서 거의 붙어있다시피 했다.
물론 속으로는 뻔했다. 연수호가 지켜주고 싶은 여자를 그녀가 무슨 수로 이기냐는 말이다.
눈치 빠른 송정우가 김유정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더니 곧바로 연수호의 어깨를 건드리며 턱짓으로 입구를 가리켰다.
“네 와이프 왔어.”
연수호는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다음 눈을 가늘게 떴다. 문 앞에 서 있는 김유정을 흘깃 쳐다보고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여긴 왜 왔어?”
“아직도 집에 안 들어와서 걱정했잖아.”
김유정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우아한 미소를 지었고, 애교 섞인 말투는 마치 진짜 둘도 없는 사이처럼 애틋하게 느껴졌다.
연수호는 못 들은 척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유정이 유유히 걸음을 옮기자 가느다란 하이힐이 바닥과 부딪히면서 또각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베이지색 원피스는 발목까지 내려왔고,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가녀린 종아리가 언뜻 보였다. 비단 같은 긴 머리는 등 뒤로 길게 늘어뜨린 채 온몸으로 비범한 아우라를 풍겼다.
안에 있던 여자들은 입을 떡 벌리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 연수호의 옆에 있던 서지태마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수호는 차가운 얼굴로 서지태를 쏘아보더니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후려쳤다.
“빌어먹을! 어딜 쳐다보는 거야!”
서지태는 머쓱하게 웃으면서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김유정의 미모는 연수호의 친구들도 익히 알고 있었다.
물론 연수호가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그들에게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정아진은 가까이 다가오는 김유정을 바라보며 연수호와 반 발짝 떨어지더니 호탕하게 웃었다.
“유정 씨, 왔어? 이리 와서 같이 놀지 않을래?”
“누가 같이 놀아준대?”
뒤따라온 안서우가 그녀를 흘겨보았다.
“언니는 우리 오빠를 데리러 왔거든?”
그녀는 정아진에게 들으라는 식으로 일부러 ‘언니’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정아진은 화를 내기는커녕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서우 동생, 혹시 나한테 적대감이라도 있는 거야?”
안서우는 씩씩거리며 되받아쳤다.
“난 당신 같은 언니가 없거든? 어디서 친한 척하는 거지?”
“안서우!”
연수호가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훑어보았고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허구한 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굴지 마.”
“수호 씨.”
김유정이 앞으로 다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벌써 새벽 1시야. 이제 집에 갈 때도 되지 않았어?”
연수호의 잘생긴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누가 여기 오라고 했지?”
“내일 또다시 연예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해서 유안 그룹의 주식에 영향 주면 안 되잖아.”
연수호가 냉소를 지었다.
“유안 그룹에 영향을 미칠까 봐 걱정되는 거야? 아니면 이정 그룹이 연루될까 봐 그러는 거야?”
“어차피 거기서 거기 아니야?”
김유정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사진 한 장을 당구대에 휙 던지더니 가늘고 하얀 손가락으로 사진 속 여자가 남자의 허리를 껴안고 있는 부위를 톡톡 건드리며 의미심장하게 정아진을 바라보았다.
“연수호가 결혼했다는 사실은 모두가 뻔한데 장본인이 아무리 파렴치하다고 해도 아진 씨는 미혼녀로서 적어도 체면을 생각해야지 않겠어? 유부남과 거기를 둬야 한다는 기본적인 상식마저 가르쳐줘야 하나?”
비록 목소리가 큰 편은 아니지만 차마 반박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흘러넘쳤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는지라 순식간에 합죽이가 되었다.
정아진도 말문이 막혔다.
“지금 누구한테 파렴치하다고 하는 거지?”
연수호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김유정은 시종일관 미소를 지었다.
“수호 씨, 체면 깎이는 일도 적당히 해야지. 그러다 바닥나면 어떡하려고?”
연수호의 잘생긴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웠고 온몸으로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