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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강은영은 조심스럽게 방 문을 열었다. 박강우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어제부터 피를 흘리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으니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지치기 마련이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그가 안쓰럽고 가슴이 아팠다. 강은영은 소리를 죽여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갔다. 링거가 다 끝나가는 것을 보고 내려가서 진기웅을 부르려는데 갑자기 뻗어나온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언제 깬 건지, 박강우가 눈을 뜨고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링거 다 끝나가서 약 갈아주려고.” 그런데 그의 눈빛이 아까부터 좀 이상했다. 강은영은 자기가 또 실수한 게 있는지 곰곰이 생각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이때 박강우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이 당신한테 연락했어?” 누굴 말하는 거지? 살짝 의아했지만 강은영은 곧 누구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박강우가 이토록 경계하게 만드는 인간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녀를 이용해서 박강우의 정보를 빼돌리고 부현그룹을 손에 넣으려고 하는 자! 강은영은 속으로 박성철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박강우는 그녀가 말이 없자 눈빛이 점점 더 음산하게 변해갔다. 강은영은 다가가서 차게 식은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여보, 나랑 박성철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야. 나 믿어줘!” 그녀는 진심을 담아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박강우는 말없이 그녀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무리 말해도 이미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잠깐만!”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아까 걸려온 번호로 전화를 걸고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상대는 연결음이 두 번 울리고 바로 전화를 받았다. “은영아, 나 지금 공항을 나가는 길이야. 이따가 너 보러 찾아갈게.” 박성철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방 안에 울리자 주변 공기마저 차갑게 가라앉았다. 강은영은 박강우의 눈치를 보며 휴대폰에 대고 소리쳤다. “오긴 뭘 와? 이게 숙모한테 버릇없이 그게 무슨 말투야! 앞으로 나 만나면 깍듯하게 숙모라고 부르고 별일 없으면 연락하지도 마!” 단 한 마디로 그녀는 관계 정리를 깔끔히 해버렸다. 순간 정적이 찾아오고 수화기 너머로 박성철의 거친 숨결이 스피커폰을 통해 전해졌다. 강은영이 박강우의 눈치를 살피며 이제 전화를 끊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박성철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삼촌이 또 협박했어? 걱정 마. 내가 최대한 빠른 시간에 출국할 수 있게 도울게.” 강은영은 음침하게 굳은 박강우의 표정을 살피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역시 강설아랑 편 먹더니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도 둘이 똑같네! 둘 다 사람 말을 못 알아들어!” 수화기 너머로 침묵이 찾아왔다. 그녀가 대놓고 강설아와 그의 관계를 까발린 것에 대한 충격때문인 것 같았다. 강은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너랑 강설아가 무슨 꿍꿍이 꾸미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앞으로 또 뒤에서 허튼 짓하면 둘 다 지옥으로 보내버릴 거니까 그렇게 알아!” 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박강우는 고요한 눈빛으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강은영은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려다가 오히려 오해만 더 산 것 같아서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일단 링거부터 갈고 얘기하자. 응?” 남자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잡고 있던 손을 풀어주었다. 강은영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자세히 약병을 확인하고 링거를 갈았다. 그리고 뒤돌아서려는데 등 뒤에서 박강우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 걔 만나지 마.” 강은영은 고개를 돌려 그의 싸늘한 시선을 마주하고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행동이 박강우의 표정을 더 싸늘하게 만들었다. ‘아니! 달랜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녀는 다시 침대로 다가가서 해맑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보, 절대 오해하지 마! 절대 박성철 따로 만나려는 게 아니야. 그런 적도 없고. 줄곧 그쪽에서 먼저 나 찾아온 거야.” “그러니까 만나지 말라고!” 박강우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사실 만나서 얼굴에 주먹을 꽂아버리고 싶어.” “필요 없어!” 박강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일을 대신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많았다. 굳이 그녀가 나설 이유가 전혀 없었다. 강은영은 그의 부상을 생각해서 더 이상 그를 자극하지 않기로 하고 수긍했다. “알았어. 안 만날게. 집에 찾아오면 고용인 시켜서 내쫓을게. 됐지?” 다친 남편의 마음을 달래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박강우는 자신의 말은 뭐든 다 들어줄 기세인 강은영을 보고 서서히 표정을 풀었다. 그녀가 다시 뒤돌아서는데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또 왜?” 강은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리 와서 자자.” 박강우가 말했다. 자자는 얘기에 강은영은 저도 모르게 어제의 거친 흔적들이 떠올라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침대로 다가가 앉으며 그에게 말했다. “내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을 테니까 당신이나 좀 더 자.” 하지만 박강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자 놀란 그녀는 급기야 슬리퍼를 벗고 침대로 올라갔다.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누우니 남자가 다가와서 그녀를 껴안았다. 등 뒤에서 뜨거운 그의 체온이 느껴지자 강은영은 혹시라도 상처 건드릴까 봐 뻣뻣하게 가만히 있었다. “안 졸려?” 박강우가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아… 아니! 졸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거의 눈을 붙이지 못했기에 강은영도 많이 지친 상태였다. 게다가 따뜻한 온기까지 전해지자 저절로 몸이 노곤해졌다. 그녀는 어느새 그의 품에 안긴 채 꿈나라로 들어갔다. 꿈 속에서 그녀는 다시 전생에 생을 마감했던 살인 현장으로 돌아갔다. 박성철과 강설아가 서로 뜨겁게 껴안고 있고 강은영 본인과 박강우의 시체는 깊은 절벽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아… 안 돼!” 강은영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눈을 번쩍 떴다. 옆에서 자고 있던 박강우도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고개를 숙이자 눈물범벅이 된 그녀가 보였다. 강은영은 멍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구슬피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강우 씨….” 박강우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물었다. “안 좋은 꿈 꿨어?” 강은영은 그의 탄탄한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이번 생에는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무서운 꿈을 꿨어. 꿈에 당신이 나 버리고 떠났어.” 박강우는 순간 흠칫했지만 이내 팔을 뻗어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날 떠나려고만 했지 내가 언제 당신 버린다고 한 적 있어?” 강은영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구슬피 울었다. 지난 생에 자신의 앞에서 죽어가던 그의 모습을 지켜만 봐야했던 것을 떠올리면 당장 달려가서 박성철과 강설아를 찢어죽이고 싶었다. “은영아, 솔직히 말해봐. 우리 줄곧 좋았잖아. 성인 되면 나랑 결혼한다고 약속했잖아.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꾼 거야?” 박강우는 줄곧 궁금했지만 차마 물을 수 없었던 질문을 꺼냈다. 강은영은 신생아 시기에 병원 앞에 버려진 상태로 박강우에게 구조되었다. 그때 당시 여덟 살이었던 박강우는 아기가 너무 귀여워 부모님께 졸라서 그녀를 집으로 데려갔다. 그녀는 아기 때부터 박강우와 줄곧 함께 자랐고 박강우는 어딜 가나 그녀를 데리고 다녔다. 그런데 그녀가 16살이 되던 해에 모든 게 바뀌었다. 그녀는 점점 박강우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점점 혐오의 감정으로 변해갔다. 강은영은 지난날을 회상하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내가 바보 같아서 그래. 강설아의 말을 그대로 믿었어.” 진실을 알게 된 강은영은 더 이상 강설아를 감싸주지 않았다. 그녀가 열 살이 되던 해, 열여섯 살인 강설아를 처음 만났다. 강설아는 박강우 할머니의 생신연회에서 박강우를 처음 본 뒤, 그녀의 가족들이 갑자기 강은영의 부모님이라며 박강우네 집을 찾았다. 순수했던 강은영은 드디어 가족을 다시 만났다는 생각에 기뻤지만 그건 모두 강영물산 대표인 강설아의 아버지와 그 가족들이 부현그룹에 연줄을 대기 위한 수작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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