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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그녀는 아버지의 친구이자 자신보다 열두 살이나 많은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처음 그를 본 날, 그는 고급스러운 수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넓은 어깨, 날렵한 허리선, 강렬한 존재감. 사람들 틈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남자였다. 그가 다가와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예쁜 드레스를 건넸다. 그 순간, 어린 그녀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그 드레스를 받아들었다. 그가 건넨 선물이, 그가 전해준 따스함이 어린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던 해. 그는 술자리에서 약에 당해 정신을 놓았고 그녀는 그의 곁에 다가가 그가 필요로 하는 해독제가 되어주었다. 그날 밤, 그 드레스를 입은 채 가장 순수한 몸을 그에게 내어주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이 변했다.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은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그의 소꿉친구인 차연희와 마주쳤다. 차연희는 문 앞에 굳어선 채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리고 이내 떨리는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차오르는 눈물, 비틀거리며 뛰쳐나가는 모습. 그녀는 말릴 수도 따라갈 수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끔찍한 일은 그 뒤에 있었다. 차연희가 정신없이 도로로 뛰여든 순간, 마침 빠르게 달려오던 차가 그녀를 그대로 덮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도로 위로 붉은 피가 퍼져 나갔고 그녀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날 이후, 그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차연희의 장례식을 치르던 날도, 그녀와 결혼하던 날도 그는 한결같이 차분했다. 그리고 매일 밤, 아무런 감정 없이 차갑게 그녀를 품었다. 그는 언제나 담담하게 말했다. “아이는 갖고 싶지 않아.” 그리고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아이를 지웠다. 열여덟 번째. 그녀는 과다출혈로 수술대 위에 누워있었다. 의사는 그의 번호를 눌러 다급히 말했다. “환자가 위독합니다.” 전화기 너머로 그는 한 치의 동요도 없이 대답했다. “죽었나요? 죽으면 연락하세요.”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그가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그의 해독제가 된 것도, 그녀로 인해 차연희가 죽은 것도. 그는 모든 걸 증오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찾아온 깊은 후회. 그녀는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과거로 돌아와 있었다. 바로 한태훈이 약물에 취했던 그날로. 평소 강인하고 냉철하며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남자. 그런데 지금은 침대에 힘없이 누운 채 셔츠 단추가 몇 개 풀려져 있었고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거칠어진 숨소리, 희미하게 떨리는 손끝. 마치 신격화된 존재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듯한 모습이었다. 서하린은 그를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전생의 그녀는 바로 이 순간에 사로잡혀 버렸다. 이성도 죄책감도 모든 걸 내팽개치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아버지의 친구이고 자신보다 열두 살이나 많다는 사실도 모두 무시한 채 그저 그의 해독제가 되어 주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나중에서야 알았다. 한태훈과 차연희는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에게 마음을 있었고 그저 용기 내어 고백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빼앗아 간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어쩌면 하늘이 그녀를 가엾게 여긴 걸까. 이번 생에서 다시 한 번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이번에는 그녀가 해야 할 일이 단 하나였다. 한태훈과 차연희를 이어주는 것.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서하린은 곧장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차연희의 번호를 눌렀다. 10분 후, 차연희가 급히 달려왔다. 서하린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두 분이 서로 좋아한다는 걸 알아요. 다만 그동안 적절한 기회가 없어서 마음을 확인하지 못한 거죠. 지금 아저씨가 약에 취해 당신이 필요해요. 지금이야말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예요.” 차연희는 전화를 받았을 때도 반신반의였지만 서하린의 말을 듣고는 더욱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나 속임수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서하린, 대체 뭐 하는 거야? 너 태훈이 좋아한다고 했잖아. 지금 태훈이가 약에 취했는데 그 기회를 이용할 생각은 안 하고 오히려 나를 불러서 우리를 이어주겠다고?” 차연희의 목소리에는 혼란과 의심이 섞여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서하린은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 이 순간, 모두가 그녀가 한태훈을 짝사랑하고 있다고 알고 있을 때였다. 예전에는 노력하면 뭐든 극복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이제는 깨달았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상처받는 건 자신뿐이라는 걸. 전생에서 그녀는 너무도 어리석었다. 서하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나직이 말했다. “이제 안 좋아하려고요. 다시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 안에서 절박하게 참는 듯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서하린은 차연희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제 버티기 힘드실 거예요. 지금 들어가지 않으면 늦어요.” 차연희는 서하린의 시선을 따라 방 안을 흘끗 바라보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럼 뭐 해? 여기 서서 듣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서하린의 몸이 순간 굳었다. 그러나 곧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 발짝 옆으로 물러나 차연희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주었다. 그리고 차연희가 한태훈의 얼굴을 조심스레 쓰다듬는 순간, 서하린은 망설임 없이 문을 닫아버렸다. 그 후, 닫힌 문 너머로 한태훈의 거친 신음과 차연희의 흐느끼는 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여 들려왔다. 그 소리는 서하린의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들며 심장을 옥죄듯 쿵쿵 울렸다. 한 번, 또 한 번 마치 커다란 망치로 가슴 내려치는 듯함 감각. 그녀는 모든 힘이 빠져나간 듯 맥없이 주저앉았다. 뜨거운 눈물이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내렸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묘한 해방감이 스며들었다. 드디어 전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서하린은 황급히 눈물을 닦고 휘청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날 밤, 옆방에서는 두 사람의 격렬한 숨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서하린은 단 한순간도 눈을 감지 못한 채 밤을 지새웠다. 해가 뜨기 전 서하린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 서규태였다. “하린아, 뭐 하고 있었어?” “누워 있었어요.” 서규태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하린아, 아빠랑 해외에서 같이 지낼 생각은 없니?” 몇 년 전, 서하 이노베이션이 해외 시장 진출을 계획하면서 서규태는 홀로 해외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딸을 혼자 두고 떠나기가 마음에 걸렸던 그는 절친인 한태훈에게 서하린을 맡기기로 했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몇 년이 지나갔다. 그동안 서하린은 한태훈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다. 해외 사업이 안정된 후, 서규태는 여러 번 그녀를 데리러 오겠다고 했지만 서하린은 매번 그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이제 한태훈과 차연희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함께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이제는 자신만의 삶을 찾아 떠날 때가 온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서하린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아빠, 저 해외로 갈게요.” 뜻밖의 대답에 전화기 너머에서 서규태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내 들려오는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꽤 격양된 느낌이었다. “우리 딸, 드디어 마음을 정했구나. 아빠가 예전부터 말했잖아. 한태훈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너무 집착한 거야. 사실 처음부터 가능성은 없었어.” “사랑을 하는 건 좋지만 그 사랑이 누구인지 잘 선택해야 하지 않겠니?” “그래서 말인데 아빠가 너한테 딱 맞는 사람을 한 명 찾아놨다. 너랑 동갑이고 곧 해외에서 만날 수 있을 거야.” “다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마음을 열어봐.” 아버지의 말에 서하린의 눈가가 다시금 뜨거워졌다. 전생에서도 아버지는 똑같은 말을 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끝내 그 말을 듣지 않았고 그 결과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야 했다. 이번 생은 다를 거라고 이번에는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곘다고 다짐했다. 서하린은 손바닥을 꼭 쥐고 힘을 주며 미소를 지었다. “네. 아빠. 아빠 말대로 할게요. 이민 수속 바로 밟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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